선암사(仙庵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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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부산 백양산의 절.

개설

선암사(仙庵寺)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처음에 견강사(見江寺)라고 하였으나 1400년(정종 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선암사로 개칭하였다. 뒷산의 신선암(神仙巖)은 신라 화랑이 무술을 닦던 곳이었다고 한다. 선암사에서 멀리 대마도가 바라보이므로 임진왜란 때는 왜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초량왜관의 왜인들이 몰래 왜관의 담을 넘어 선암사에 드나들다가 발각되어 처벌을 받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과 명칭

부산 백양산에 소재한 선암사는 675년(신라 문무왕 15)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실려 있는 1868년의 중수기(重修記)와 1938년의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에 의하면, 803년(신라 애장왕 4)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 절 이름을 견강사(見江寺)라고 하였다. 그 후 1400년(정종 2)에 견강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절 이름을 선암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원래 견강사가 있던 자리에서는 멀리 낙동강이 보였기 때문에 ‘강이 보인다’는 의미에서 견강사라고 하였지만,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뒤로는 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절 이름을 선암사라고 고쳐 불렀다.

선암사라고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시대 때 절 뒷산 절벽 바위 위에서 화랑들이 무술을 닦아서 바위 이름을 신선암(神仙巖)이라 불렀는데, 그 아래에 절을 지으면서 그 바위 이름을 따서 선암사라고 개칭하였다고도 하고, 선암사가 자리한 백양산이 멀리 대마도가 바라보이는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서 신선이 노닐 만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선암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2) 고려시대 삼층석탑

고려시대 선암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서 그 규모나 내력을 알기는 어렵지만, 선암사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3호)이 고려시대 양식을 갖추고 있어서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탑신은 없고 옥개석 3매만 남아 있는 규모가 작은 석탑이다. 옥개석의 크기와 체감율을 고려할 때 삼층석탑 옥개석으로 판단된다.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1400년에 절을 옮겨 지을 때 원래 있던 자리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3) 조선시대의 중수

조선시대 선암사는 1483년(성종 14)에 각초(覺招)가 중창하고, 1568년(선조 1)에 신연(信衍), 1781년(숙종 44)에 선오(禪悟)가 각각 중수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이 불상에서 1658년(효종 9)에 조성되고 1693년(숙종 19)에 중수된 발원문이 출토되었지만,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1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현재 선암사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5세기에 조성되었지만 1658년과 1693년의 발원문이 복장되었다는 것이다.

선암사는 조망이 좋아 날씨가 좋을 경우 멀리 대마도까지 보인다. 그래서 왜적이 침입해 올 경우 병사들이 선암사에 올라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8월 13일).

(4) 초량왜관 왜인의 선암사 출입

선암사는 초량왜관(草梁倭館)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초량왜관의 왜인(倭人)들이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종종 발견된다. 원래 왜인들은 동래부의 허락을 받아야 왜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불법적으로 담을 넘어 드나드는 왜인들도 있었다. 1665년(현종 6)에 초량왜관의 왜인들이 왜관 담을 넘어 선암사를 왕래하다가 들켜 처벌을 받기도 했다(『현종실록』 6년 5월 17일).

참고문헌

  • 조선총독부 찬집, 『조선사찰사료』, 경성인쇄소, 1911.
  • 김강일, 「조선후기 왜관의 운영실태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장순순, 「조선시대 왜관변천사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최은령, 「부산 선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발원문」, 『석당논총』48,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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