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두안(宣頭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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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수사에 소속된 공노비를 20년마다 조사하여 기록한 원적부(原籍簿).

개설

선두안(宣頭案)은 내수사에 속한 노비의 명단을 기록하여 왕에게 바친 원적부로, 노비안의 다른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선두안을 통해 내수사 노비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으며, 내수사 노비가 다른 노비에 비하여 더 우대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선두안의 혁파는 곧 공노비 혁파와 연계된 것이었다.

내용 및 특징

선두안은 고려시대 왕실 재정을 운영하는 덕천고(德泉庫)에 두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1403년(태종 3)에 덕천고가 내섬시로 개칭되자, 선두안은 내섬시에 두었다. 1464년(세조 10)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 선두안은 내수소(內需所)에 1건만 두었는데, 이 무렵 농간을 부리는 것에 대비하고, 기록을 추가로 고치고나 또는 잃거나 훼손할 때에 나중에 살펴보기 위하여 선두안 3건을 만들어 1건은 도관(都官)에, 1건은 가각고(架閣庫)에, 1건은 내수소에 보관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0년 8월 11일).

선두안이 보관되어 있던 곳 가운데 하나인 도관, 즉 형조도관은 이후 노비를 관장하는 기관인 장례원으로 바뀌었다.『경국대전』에 따르면, 내수사 노비, 즉 선두안에 기록된 노비를 장례원에서 검거하게 하고, 정안(正案)과 속안續案)을 작성하여 장례원·형조·본사·본읍에 각각 1건씩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선두안이 여러 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 「형전」 ‘공천’조에는 내수사 노비들에 대하여 3년마다 속안을 만들고, 20년이 되면 정안을 고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정안에 붙인 노비에 대해서는 송사할 수 없도록 하였다. 내수사 노비의 정안과 속안을 만드는 것은 공노비의 것에 준하도록 하였다. 조선초부터 노비와 관련한 송사들이 끊이지 않고 많은 조처들이 취해졌으나, 국가로서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문제점에 대한 지적만 이어졌다.

공천·사천(私賤)들을 꾀어내어 내수사에 속하게 하고 선두안에 거짓으로 이름을 올리는 예도 나타났다. 공천과 사천을 포함한 노비들은 역(役)이 고되고 바치는 것이 많았으며, 마을에서도 우대를 받지 못하고 공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등 거리낄 만한 점들이 많은 반면, 내수사의 노비가 되면 수령이나 향리에서 우대하고 이졸(吏卒)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으며, 신역도 무겁지 않아서 당사자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각 관서 노비들에게도 소속을 옮기도록 유인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이와 관련하여 성종대에 내수사 노비에 대한 송사가 허가되었으나, 노비와 관련한 송사가 빗발쳐서 제대로 처결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다시 송사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였지만, 노비들이 내수사나 권세 있는 가문의 노비가 되는 사례들은 점점 늘어나 그 같은 양인과 공천, 사천을 모두 찾아내라는 조처가 취해지기도 했다.

내수사의 노비를 추쇄하고자 신고하게 하자, 노비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누락되었다고 하거나 추가로 등록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또는 주인에게 공물을 바친 뒤 몰래 선두안에 기록하는 자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 때문에 노비와 관련한 소송들이 매우 복잡해졌다. 1778년(정조 2)에는 한시적으로 노비를 추쇄하면서 선두안이나 각 관서에서 올린 노비안을 수정할 때 물력을 마련하기 위하여 매 호(戶), 매 명(名)에 2냥씩을 노비에게 징수하여 추쇄관이 가져가서 문제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변사절목』에서는 추쇄관을 혁파하고, 10년 동안 한 차례마다 5전씩 거두어 수정할 때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도록 규정하였으며, 선두안을 상납할 때에 해당 관사의 하속들이 농간을 부리는 일이 있으므로 순영에서 직접 승정원에 바쳐서 왕에게 아뢰도록 하였다. 이로써 노비추쇄는 쇄관(刷官)이 아닌 영읍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도 이후 선두안에 오른 건장한 노비에게 5전을 받았을 때의 문제점 때문에, 3전을 받아 1전은 고을에서 초안을 작성하는 데 사용하고 2전은 감영에 바쳐 정안을 작성할 때에 드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자는 함경감사의 건의가 있었으며, 그 결과 그보다 줄인 2전 5푼을 거두어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조선후기 선두안에 실린 노비들은 관노비, 특히 내수사의 노비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시노비(寺奴婢), 관아·향교·서원의 노비, 사노비 등과 구분되었다.

변천

태종대에 덕천고의 선두안을 내섬시에 합속하였고 세조대에 내수소에 이속시킴으로써 선두안은 내수사의 노비안을 의미하게 되었다. 내수사 노비는 1778년 비변사에서 『팔도내노비추쇄혁파절목』을 만들어 추쇄관을 혁파하는 조치를 취하여 선두안을 개정할 때마다 노비들에게 돈을 거두던 방식을 개혁하였다. 이는 영조 연간에 노비 연공을 감하는 조치를 취한 후 노비 제도에 관한 새로운 조치라고 할 수 있으며, 1801년(순조 1)에 내노비(內奴婢)를 혁파하는 조치와 맥을 같이한다.

의의

선두안은 조선시대 공노비의 현황을 살필 수 있는 문건이다. 선두안의 폐기는 곧 공노비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신분제적인 질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선두안은 이러한 모습들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내섬시력(內閣日曆)』
  • 『팔도내노비추쇄혁파절목(八道內奴婢推刷革罷節目)』
  • 『내수사급각궁방전답총결여노비총구도안(內需司及各宮房田畓總結與奴婢總口都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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