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장(石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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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감(繕工監)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돌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

개설

돌을 떠내거나 깎고 다듬어 다루는 일을 하거나 석물을 만드는 석장(石匠)은 석수(石手)·석공(石工) 등으로 불렸다. 그들은 선공감에 소속되어 성을 쌓거나 궁궐을 짓거나 왕릉을 조영하였다. 조선시대 내내 주로 석장보다는 석수로 불렸다.

담당 직무

석장은 돌을 다루는 장인으로서 국가적인 영건 사업에 동원되어 석물을 다듬거나 석조각을 제작하는 일을 하였다.

첫째, 조선초기 한양에 궁궐을 조성할 때 석수를 동원하여 석물을 세웠다. 이들 장인은 서대문이나 광화문 등의 4대문을 세울 때에도 기단부와 초석을 다듬기 위해 많이 동원되었다(『태조실록』 3년 2월 15일). 연산군 때에는 서총대를 조성한 석장에게 월봉(月俸)으로 제용감의 면포와 정포를 주기도 했다(『연산군일기』 11년 9월 8일).

둘째, 조선후기에 영건도감을 설치 운영하여 불에 탄 궁궐을 중건할 때 석수들을 동원하였다. 그들은 인경궁을 영건하거나(『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1월 17일), 경덕궁을 영건할 때마다 돌을 다듬는 일을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9월 22일).

셋째, 왕릉을 조영할 때 동원하여 석물을 제작하였다. 중종 때 희릉을 옮기기 위해 석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2년 4월 23일). 광해군 때 선조의 목릉(穆陵)을 수개하는 도감에 석수를 동원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월 24일). 조선후기 산릉도감의 대부석소(大浮石所)와 소부석소(小浮石所)에 석수가 동원되었다.

넷째, 지방의 관아에 소속된 외공장으로 총 3명의 석장이 소속되어 해당 지역에 성을 쌓거나 건물을 영건할 때 동원되었다.

변천

조선초기 국가에서는 궁궐을 짓거나 성벽을 수축하는 등 대규모 건축 공사를 벌였다. 1421년(세종 3) 12월에 도성을 축성할 때 동원된 공장(工匠)은 2,211명이었다. 당시 장인들은 관청에 속한 사람도 있지만 관아에 속하지 않은 장인들이나 지방에 소속된 장인들도 많이 동원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선공감에 석장 14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목장 60명과 야장 40명과 함께 선공감 전체 346명의 장인의 40%를 차지하는 숫자이다. 선공감은 토목과 영선을 관장하는 부서이기 때문에 장인 대부분이 궁궐이나 성곽을 세우는 업무에 종사하였다. 선공감의 장인들은 보정(保丁)이 없어졌기 때문에 기술이 높은 장인은 많은 이익을 남겼지만 역에 대한 대가가 줄어들자 장인들이 이탈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장인들의 처지나 직역이 변화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대전통편(大典通編)』이나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보이는 이들 장인들의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당시 왕실의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던 도감에 동원된 석수를 통해 그 변화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궁궐을 영건하거나 왕의 사후 왕릉을 조성할 때마다 도감을 설치 운영하였다. 각 도감에서는 품질이 좋은 석재를 얻기 위해 생산지마다 부석소(浮石所)를 설치하였고, 경기·충청·황해·강원·전라도에 공문을 보내어 장적(匠籍)에 등록된 석수들을 징발하였다.

17세기에는 왕이나 왕후의 사후 왕릉을 조성할 때에 산릉도감 대부석소에 동원된 석수는 대체로 150여 명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100명 내외로 줄어들었고, 17세기와 마찬가지로 각각 모조역(募助役) 1명과 육조역(肉助役) 1명이 배정되었다. 19세기에는 산릉도감에 동원되었던 서울과 지방의 석수들을 항상 등록에 명기하였다가 산릉 공사가 있을 때마다 120명 내외를 차출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도감에 징발되는 석수는 그 인원수가 100명 이상으로 많아 도감마다 중복해서 차출되는 숫자 또한 많았다. 이들 중 30∼40년 이상 장기간 활동한 석수는 장인의 우두머리인 변수(邊首)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전반 석수는 좌·우변 부석소로 나눠 좌변이나 우변의 변수를 맡았는데, 1675년에 좌·우변이 통합된 이후 조말룡(趙唜龍)은 도변수(都邊首)에까지 올랐다.

도감에 동원된 석수는 활동 일수에 따라 1·2·3등의 상이 주어졌으나 1등 및 2등은 서울 장인에게, 3등은 지방 장인에게 수여되었다. 17세기∼18세기에 대부석소 및 소부석소 석수 중에는 한 집안의 세습적 경향이 다른 장인보다 많이 나타나며, 개인 또한 장기간 동원되는 경향이 많았다. 19세기에는 대부석소에서 1800년 정조 건릉을 영건할 때의 도감에 동원된 장인들은 장인 개개인의 이름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이후 도감부터는 대표 석수의 이름만 명기하고 나머지는 패 또는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일부 석수 중 장인의 우두머리인 변수들은 공역이 끝나면 면천이 되거나 공명첩상의 품계가 가의에 올라가는 경우가 생겼다. 한편 19세기 각 산릉도감에서도 대부석소에 동원되었던 서울과 지방의 석수들을 항상 등록에 명기하였다가 각종 석역(石役) 공사가 있을 때마다 차출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김동욱, 『한국 건축장인고』, 기문당, 1995.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장경희, 「조선 후기 흉례도감의 장인 연구」, 『미술사논단』 8호, 1999.
  • 장경희, 「조선 후기 산릉도감의 장인 연구」, 『역사민속학』 25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