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직(黍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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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제향에 올리는 제물의 하나로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한해살이풀의 열매.

개설

서직(黍稷)은 오늘날 여러 의미를 지닌다. 조선왕실에서 제향 때 사용한 서(黍)는 메기장, 직(稷)은 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서직을 기장과 피를 아울러서 부르는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견해가 생긴 이유는 고대 중국에서 서직을 서와 직으로 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오곡(五穀)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에는 서직을 피로 이해하기도 했다. 태종은 황해도 평산의 온천에 거동하면서 모맥(麰麥)이 이미 익고, 서직이 바야흐로 자라는 때이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다(『태종실록』18년 4월 8일). 여기에서의 모맥은 보리, 서직은 피일 가능성이 많다. 기장은 5월 하순~6월 중순에 파종을 하는 데 비해, 피는 4월 중순~5월 하순에 파종을 하고, 음력 4월 초순은 대체로 양력 5~6월에 해당하며 피를 이미 파종하여 익는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제사 때 바깥이 모나고 안이 둥근 것을 보(簠)라 하는데, 여기에는 벼와 기장인 도량(稻粱)을 담았다. 안이 모나고 바깥이 둥근 것을 궤(簋)라 하는데 여기에는 서직을 담았다. 여기에서의 서직은 메기장과 피를 가리켰다. 『물명고(物名考)』에서는 “직(稷)은 메기장을 가리킨다. 직을 피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서(黍)는 찰기장을 가리킨다.”고 했다.

원산지 및 유통

서직을 메기장과 찰기장으로 보는 견해와 기장과 피로 보는 견해를 모두 따른다. 기장은 동부아시아에서 대륙성기후의 온대지역이 원산지로 알려졌다. 『산해경(山海經)』의 “부여국(扶餘國)에 열성(列姓)이 서식(黍食)”이라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기원전에 한반도에 전파되어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확량이 적고 주식으로 이용하기도 부적합하며, 경상도와 강원도의 산간마을에서 재배된다. 피는 아시아가 원산지로 한반도 전역에서 재배된다. 기장에 비해 피가 훨씬 널리 재배되었다.

연원 및 용도

조선왕실의 제향에서는 보와 궤 두 그릇을 변(籩)과 두(豆) 사이에 놓되 보를 왼편에, 궤를 오른쪽에 놓았다. 보에는 벼와 기장을 담는데 기장을 벼 앞에 두며, 궤에는 메기장과 피를 담는데 피를 메기장 앞에 두었다(『세종실록』 1년 12월 7일). 이와 같이 서직은 왕실 제향에서 사직의 곡물을 상징하는 제물로 쓰였다. 그래서 서직은 제물을 총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상서(尙書)』 「군진(君陣)」에서는 “제물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이의 마음이 중요하다[黍稷非馨, 明德惟馨]”는 말에서 서직을 제물의 총칭으로 썼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인사문(人事門)」에서는 서인(庶人)의 가례(家禮)에 쓰이는 제물 중에 서직이 있다고 했다. 이때의 서직은 메기장과 피가 아니라 제사에 올리는 메를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1월 상원(上元), 즉 보름의 풍속으로 “시골 사람들은 보름 하루 전날에 짚을 군대깃발인 둑기[纛旗] 모양으로 묶고 그 안에 벼[禾]·기장[黍]·피[稷]·조[粟]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를 그 장대 끝에 매달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사방으로 벌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벼 낟가리[禾積]라고 하며 이것으로 풍년을 기원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벼·기장·피·조는 곡물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민간에서는 기장과 피가 들어간 오곡밥을 지어서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물명고物名考』
  • 『산해경(山海經)』
  • 『상서(尙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