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西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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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선조가 일본군의 침입으로 도성을 버리고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 간 사건을 비유한 말.

개설

서수(西狩)란 춘추시대 서수획린(西狩獲麟)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공자 만년에 노(魯)나라 숙손씨(叔孫氏)가 서쪽으로 사냥갔다가 기린(麒麟)을 잡았다. 이것을 본 공자는 울면서 “내 도가 다했다[吾道窮矣].”라는 말을 남긴 후 『춘추(春秋)』의 저술을 마치고 더 이상 붓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상서로운 짐승인 기린이 성인(聖人)이 없는 때에 세상에 잘못 나와서 불행하게 된 것처럼 자신도 본인의 이상을 현세에서는 펼칠 수 없었음을 탄식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 선조는 한성·개성·평양의 삼도(三都)를 일본군에 내어주고 압록강 서북단의 의주부(義州府)까지 피난하였는데, 당대인들은 왕인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한 이 불행한 사건을 서수획린의 고사에 비유하여 서수라고 하였던 것이다.

내용 및 특징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오후, 700여 척의 일본군 선박이 부산진 앞바다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임진왜란의 개전 초기, 조선군은 전력의 뚜렷한 열세를 보이며 일방적 패배를 거듭하였다. 좌로·중로·우로로 나뉘어 북진한 일본군은 4월 25일에는 상주에서, 4월 28일에는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 주력을 궤멸시켰다. 조정은 거듭 도성 사수의 의지를 밝히는 한편, 도성 출입을 금지하여 도성민의 이탈을 방지하려고 애썼으나 민심의 동요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4월 29일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신립(申砬)이 충주 전투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이 도성에 도착하자, 조정은 결국 선조의 파천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앞세운 선조는 4월 30일 새벽에 비를 맞으며 100여 명 남짓의 신료와 함께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을 빠져나왔다. 도성을 빠져나온 선조 일행은 모래재[沙峴]·홍제원(洪濟院)·벽제관(碧蹄館)·동파역(東坡驛)·판문(板門)을 거쳐 5월 1일 저녁 무렵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이후 도성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피난길을 재촉하여 5월 7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6월 2일 선조는 평양의 부로(父老)들에게 더 이상의 북행은 없다고 공언하였지만, 6월 10일 일본군이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는 소식에 다시 임시 거처인 행재소(行在所)를 북쪽으로 옮겼다. 6월 22일 선조 일행이 도착한 곳은 조선의 서북단 압록강변의 의주부였다.

선조의 피난 이후 도성의 혼란과 민심 이반은 극에 달하였다. 4월 30일 새벽 흥분한 난민(亂民)들은 궁궐과 관청의 집기를 약탈하고 노비 행정 전반을 관할하던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에 보관 중이던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서를 불살라버렸다. 유도대장(留都大將)이양원(李陽元)은 몇몇 난민을 붙잡아 참수하며 질서 유지에 힘썼지만, 한번 등 돌린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다. 5월 2일 정오경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한강에 도착하여 조선군과 대치하였다. 일본군이 도원수김명원(金命元)의 진영이 있는 제천정(濟川亭: 현 용산구 보광동 소재)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하자, 김명원은 저항을 포기하고 병기를 강물에 던져버린 뒤 도주하고 말았다. 휘하의 조선군 1천 명도 모두 달아났고, 부원수신각(申恪)은 유도대장이양원과 합류하여 양주(楊州)로 피신하였다. 일본군이 텅 빈 도성에 들어온 것은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고 사흘이 지난 5월 3일 새벽 무렵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는 동대문이 열려있고 방어 시설이나 병력이 전무함을 보았으나 이를 믿지 못하여, 정탐병을 보내 수차례 복병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입성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후속 부대도 속속 서울에 입성하였다.

변천

1593년(선조 26) 4월 20일 도성이 수복되자, 곧바로 조정의 신료들도 조·명 연합군을 따라 들어와 도성 내의 치안 및 질서 회복을 위한 제반 조취를 취하며 선조의 환도(還都)를 기다렸다. 철군한 일본군의 잔류 부대가 여전히 남해 연안에 결집되어 있고, 도성의 치안과 방어가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귀경을 차일피일 미루던 선조는 같은 해 10월 4일이 되어서야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성 내의 궁궐과 관아 대부분이 불타버리고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선조는 정릉동(貞陵洞)에 있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을 임시 거처인 행궁(行宮)으로 정하고 도성의 복구와 도성민의 구휼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허태구, 「임진왜란과 서울의 변화」, 『서울 2천년사 ⑫-조선시대 정치와 한양』,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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