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언해(書經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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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대에 『서경(書經)』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

개설

『서경언해(書經諺解)』는 선조의 명에 따라 중국의 삼경(三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이다. 5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전언해(書傳諺解)』라고도 한다. 다른 사서삼경과 함께 1580년 대에 언해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언해한 원고를 모두 잃어버리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간행작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이전에 언해된 사경(四經)과는 달리 방점이 삭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기상에도 많은 수정이 가해져서 강해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언해 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선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유숭조(柳崇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경전(經典)에 토를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선조는 1585년(선조 18)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에 구결을 달고 해석하는 방식이 유학자들마다 다름으로써 빚어지는 혼란을 바로잡으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대학언해(大學諺解)』를 비롯하여 『논어언해(論語諺解)』·『맹자언해(孟子諺解)』·『중용언해(中庸諺解)』 등이 간행되었다.(『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그리고 이렇게 간행한 교정청본을 관본(官本)이라고 하여 개인본과 구별하였다. 이 사업에는 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한백겸(韓百謙)·정개청(鄭介淸)·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소학(小學)』을 시작으로 하여 1587년(선조 20)에는 『서경언해』를 비롯한 사서삼경의 언해가 모두 끝이 났다.(『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이어 간행작업이 시작되어 1590년(선조 23) 사경(四經)의 간행이 완료되었으나, 삼경은 1591년(선조 24)에 발생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전쟁 당시 언해한 원고마저 잃어버리면서, 1601년(선조 34) 이후 다시 『서경언해』의 간행이 추진되었다.(『선조실록』 34년 10월 19일),(『선조실록』 36년 5월 13일) 그 결과 1606년(선조 39) 『주역언해(周易諺解)』가 간행되었고, 1613년(광해군 5)에는 총 20권의 『서경언해』가 간행되었다가 다시 5권으로 간행되었다.

한편 다른 경서 언해들은 모두 그 편찬 과정 및 참여자들을 적은 내사기(內賜記)를 가지고 있으나, 『서경언해』에는 내사기가 없다.

서지 사항

5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책의 크기는 세로 32.6cm, 가로 21.8cm이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전하는 판본 중 최고본은 1695년(숙종 21)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신자활자본(戊申字活字本)으로, 성암고서박물관에 그 전질이 소장되어 있으며, 영본은 서울대학교 일사문고에 있다. 그리고 간행연도를 알 수 없는 개주갑인자본(改鑄甲寅字本)이 있으며, 목판본으로는 ‘세경오중춘개간전주하경룡장판(歲庚午仲春開刊全州河慶龍藏板)’, ‘경진신간내각장판(庚辰新刊內閣藏板)’, ‘병술신간영영장판(丙戌新刊嶺營藏板)’, ‘임술계춘영영중간(壬戌季春嶺營重刊)’의 간기를 가진 것들이 있다. 각각 1810년(순조 10), 1820년(순조 20), 1826년(순조 26), 1862년(철종 13)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성/내용

『서경』은 일명 『상서(尙書)』라고도 한다. ‘상(尙)’은 ‘상(上)’과 통하는 바 상서란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글이란 뜻이며, 또 이제(二帝)·삼왕(三王)의 훌륭한 말씀과 선정(善政)의 내용이 담겨 있어 높일 만한 글이란 뜻이다. 그만큼 『서경』은 중국 고전 중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 할 수 있는데, 오랫동안 『시경(詩經)』과 함께 병칭되었으며, 여기에 『역경(易經)』을 포함하여 ‘삼경’이라 불려왔다.

『서경』은 우(虞)·하(夏)·은(殷)[상(商)]·주(周)의 네 왕조(王朝)를 배경으로, 전(典)·모(謨)·훈(訓)·고(誥)·서(誓)·명(命)의 여섯 가지 문체(文體)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사서(四書)·육체(六體)라 하며, 여기에 정(征)·공(貢)·가(歌)·범(範)을 더하여 십례(十例)라고 하기도 한다. 시대를 살펴보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알려져 있는 요(堯)·순(舜) 시대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노(魯)·진(秦) 등 열국(列國)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물론 그 내용은 당시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일찍이 “공자(孔子)가 시(詩)·서(書)를 산정(刪定)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금 전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서(書)가 있었으나 공자가 불필요한 편을 삭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천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공자가 평소 시·서와 집례(執禮)를 자주 언급하였고, 『서경』의 내용이 『논어(論語)』 등에 자주 보일 뿐만 아니라, 『논어』의 「요왈편(堯曰篇)」은 거의 대부분이 『서경』을 축약해 놓았다는 사실에서 『서경』이 공자의 문하에서 중요한 교과서로 쓰였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공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맹자(孟子) 역시 『서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이처럼 『서경』은 동양 여러 나라의 정치문화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경전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특히 조선의 모든 정치사상은 이 『서경』에서 나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선현(先賢)들의 상소문(上疏文)을 정확히 읽으려면, 반드시 이 『서경』을 먼저 읽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시대에 그것을 언해한 것은 당연하다.

‘삼경언해’는 교정청본 사서언해와 함께 관본(官本)이라는 후광을 입고 그 뒤로도 중앙이나 각 도 감영(監營),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각 처의 서사(書肆)에서 계속 중간본·복각본이 간행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한편 선조 때나 광해군(光海君) 때에 간행된 사서삼경 언해의 초간본은 중세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고 그 후의 이본(異本)들은 음운변화를 담고 있어 국어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서언해의 초간본에서는 ‘ㅿ’이 사용된 부분들이 대부분 ‘ㅇ’으로 변화하였으며, ‘ㄷ’과 ‘ㅅ’이 어말 자음에서 구분되었고, 자음동화현상이 표기에 나타난다는 특징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렇듯 한자음의 표기에서 ‘ㅿ’이나 ‘ㆁ’이 나타나는 경서 언해들의 특징이 현재 전하는 『서경언해』 중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학주, 『서경해제』, 명문당, 1971.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