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양역(生陽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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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중화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생양역(生陽驛)은 중화군 서쪽 2리(약 0.8㎞)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驛) 중에서 평안도에 위치한 역들을 ‘관(館)’이라고도 호칭했던 까닭에, 사료상에는 생양관(生陽館)으로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생양역은 고려시대에는 서경(西京: 현 평양)에 위치했으며, 절령도(岊嶺道)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생양역을 포함하여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곳들은 모두 대동도(大同道) 소속 역으로 편성하였다.

내용 및 변천

생양역은 조선시대 평안도 중화에 위치했던 유일한 역이다. 고려시대에는 절령도(岊嶺道) 소속으로 서경에 위치하였으나, 묘청의 난 이후 서경기(西京畿) 지역에 중화 등 몇 곳의 군현이 신설되면서 생양역은 중화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중화 지역에서 ‘고생양(古生陽)’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므로, 고려시대의 생양역은 조선시대의 생양역과 상이한 곳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생양역의 위치 이동은 조선초기 절령로(岊嶺路, 황해도 황주의 자비령)의 폐지 및 극성로(棘城路)의 개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평안도 지역의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13곳의 역관(驛館)들은 모두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의 관할하에 있었다. 생양역 역시 평안도관로찰방 관할하의 13곳 역관(驛館)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관로찰방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462년(세조 8) 전국적인 역도제(驛道制)의 개편 때 평안도 지역은 역도 편성에 변화가 없었으며, 이후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모두 생양역은 대동도의 소속 역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생양역에는 역마(驛馬) 28마리, 역노(驛奴) 55명, 역비(驛婢)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생양역은 남쪽으로는 황주 방면, 북쪽으로는 평양 방면을 연결하는 한양~의주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생양역에서는 남쪽으로 황주 경천역(敬天驛), 북쪽으로 평양 대동역(大同驛)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생양역도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생양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관봉리에 해당한다. 한편 고려시대의 생양역은 조선시대 생양역보다 동쪽에 위치한 현 중화군 어룡리 지역으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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