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上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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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 후보지로 거론된 묘향산의 사찰.

개설

묘향산 상원사(上元寺)의 창건이나 내력은 불분명하다. 상원사에 관한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거론하는 가운데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내사고(內史庫)였던 춘추관과 외사고(外史庫)였던 충주사고·성주사고·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전주사고본을 안전하게 보관할 곳을 물색하던 중에 거론된 곳이 묘향산 상원사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묘향산 보현사에 사고가 설치되어 실록이 보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세 곳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본은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참봉오희길(吳希吉)이 태인현의 선비 손홍록(孫弘祿), 안의(安義)와 함께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보관함으로써 전란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596년(선조 29)에 조정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사고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묘향산으로 옮기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때 윤두수(尹斗壽)가 묘향산 상원사가 안전한 곳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실록을 묘향산에 옮기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선조실록』 29년 11월 7일). 그 후 『조선왕조실록』은 황해도 해주로 옮겼다가 묘향산에 옮겨 보관하였고, 다시 강화도로 옮겨 보관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전주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하여 1606년(선조 39)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3부를 새로 제작함으로써 전주사고본과 교정본을 합쳐 모두 5부의 실록을 갖추게 되었다. 조정은 『조선왕조실록』의 제작과 더불어 보관할 장소를 찾기 위해 경기도·강원도·경상도감사에게 사고 후보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여 알맞은 입지를 물색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강원도 오대산, 경상도 태백산,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묘향산이었다. 그래서 춘추관에는 새로 제작한 신인본(新印本)을 보관하고, 마니산사고에는 전주사고의 원본,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는 신인본을 보관하였다. 이때 묘향산사고는 보현사(普賢寺)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1596년 조정에서 사고지로 논의했던 묘향산 상원사와 강화도로 옮기기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묘향산의 사고지와 1606년에 『조선왕조실록』을 옮긴 보현사사고가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춘추관의 『조선왕조실록』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모두 소실되었고, 이후로는 춘추관에 사고를 두지 않았다. 묘향산사고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고를 북방에 두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의 건의에 의해 폐지되어, 무주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묘향산사고본을 1618년부터 1633년까지 모두 옮겼다. 적상산사고본은 일제강점기에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이 가져갔다.

참고문헌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기태, 「조선사고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 『기전문화연구』29·30합집, 경인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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