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국사(相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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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하사한 밀교대장경 판본 및 경전을 소장했던 일본 교토[京都]의 사찰.

개설

교토 상국사(相國寺)는 임제종(臨濟宗) 사원으로 1382년(고려 우왕 8)에 개창되어 오산(五山) 문학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여러 차례 화재와 중창을 거듭하면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1423년에는 조선에서 범자(梵字)로 된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한 80권 『화엄경(華嚴經)』, 그리고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을 하사받아 소장하였지만 모두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다.

내용 및 특징

(1) 사찰의 내력

상국사는 1382년에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장군이었던 족리의만(足利義満)이 임제종의 춘옥묘파(春屋妙葩) 선사를 초청하여 개창한 사찰이다. 1392년에 배문(排門)·총문(總門)·산문(山門)·불전(佛殿)·토지당(土地堂)·조사당(祖師堂)·법당(法堂)·고원(庫院)·승당(僧堂)·방장(方丈)‧욕실(浴室)·동사(東司)·강당(講堂)·종루(鍾樓) 등의 여러 당우가 완성되었고, 1399년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2대 장군인 족리의전(足利義詮)이 죽은 지 33년이 되는 해로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칠중대탑(七重大塔)을 건립하였다. 이 칠중대탑은 높이 109.1m로 일본 최고의 불탑이었지만 후대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었다. 상국사는 경도 최대의 선종 사찰 가운데 하나로서 오산(五山)문학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오산문학이란 경도의 남선사(南禪寺), 천룡사(天龍寺), 상국사 등 몇몇 선종 사원을 중심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선승(禪僧)들이 개성 있는 작품을 남겼던 것을 말한다.

상국사는 1394년과 1425년의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지만 다시 중창되었다. 그런데 1467년 응인(應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상국사가 전쟁터가 되면서 또다시 전소되었다. 그리고 1551년에도 전쟁에 휘말려 소실되었다. 그 후 1584년에 서소승태(西笑承兌)가 주지가 되어 상국사를 크게 중창했고, 현존하는 법당은 이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1620년과 1788년에 일어난 큰 화재로 법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의 대부분은 19세기 초에 재건된 것이다.

(2) 밀교대장경판의 봉안

상국사는 조선 세종이 하사한 우리나라 밀교대장경판과 여러 경전들이 소장되었던 곳이다. 일본은 조선이 건국된 후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는데, 1394년(태조 3)에 일본진서절도사(鎭西節度使)원요준(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을 요구했고(『태조실록』 3년 12월 26일), 1396년(태조 5)에는 일본 좌경권대부(左京權大夫)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이 통축(通笁)과 영림(永琳)이라는 두 승려를 보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요구했으며(『태조실록』 5년 3월 29일), 1397년(태조 6)에는 일본 구주(九州)의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태조실록』 6년 12월 29일).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1398년(태조 7)에 조선 조정은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을 서울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태조실록』 7년 5월 12일). 행여나 왜구에 의해 대장경이 탈취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장경을 요청했던 시기는 무로마치 막부(1336~1573)시대로서 막부의 공식적인 요구와 일본 내 실력자들의 사적인 요구가 있었다. 막부는 사실상 일본의 정부이기 때문에 공식 사절로서 요청한 것이지만, 다다량의홍이나 원도진 같은 이는 구주(九州)의 실력자로서 개인적으로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요청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구주의 실력자들이 사적으로 대장경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왜구를 막아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본 막부와 구주 실력자의 대장경 요구로 조선에서는 1398년(태조 7)부터 1501년(연산군 7)까지 대략 100여 년 간 수십번에 걸쳐 대장경을 하사하였다. 막부에서 요구할 경우 대부분 5,000권이 넘는 경전들을 하사했으므로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일본의 대장경 요구는 처음에는 인쇄된 경전만을 달라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398년(태조 7) 12월에 일본의 다다량의홍이 영지(靈智)라는 승려를 보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요구할 때 대장경판을 함께 요구하였다. 이후로도 대장경판의 요구가 이어졌는데 1423년(세종 5)에 일본 사신 규주(圭籌) 등이 또 다시 대장경판을 요구하자(『세종실록』 5년 12월 25일)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대장경이 오직 1본밖에 없으므로 요구에 응하기 어렵다며 거절하고, 대신에 범자(梵字)로 된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한 80권 『화엄경(華嚴經)』, 그리고 『주화엄경(注華嚴經)』 경판을 주겠다고 하였다(『세종실록』 6년 1월 1일).

세종은 개성에 소재한 금사사(金沙寺)의 밀교대장경 목판과 영통사(靈通寺)의 주화엄경판, 그리고 운암사(雲巖寺) 금자 사경의 『화엄경』을 배에 실어오도록 하여 일본에 하사하였다. 조선에서는 회례사(回禮使)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이예(李藝) 등으로 하여금 밀교대장경판 등을 전달하게 하면서 추가로 여러 경전을 함께 보냈다. 당시 보낸 경전은 금자 사경의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密經)』·『아미타경(阿彌陀經)』·『석가보(釋迦譜)』, 청지(靑紙)에 금자로 쓴 단본(單本) 『화엄경』 등이었다(『세종실록』 6년 2월 7일). 이렇게 해서 세종은 밀교대장경판을 비롯하여 『화엄경』과 『주화엄경(注華嚴經)』 경판 등을 일본에 하사하였고, 일본에서는 이 하사품을 상국사에 소장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12월 17일). 상국사에서 소장했던 밀교대장경판과 경전 등은 모두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상국사의 화재는 조정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세종실록』 8년 5월 21일).

밀교대장경은 고려말에 밀교 경전만을 모아서 90권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판각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재조대장경이 조성된 1251년(고려 고종 38) 이후로부터 밀교대장경을 사경했던 1328년(고려 충숙왕 15) 사이에 간행되었을 것이다. 그 목판은 개성의 금사사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1401년(태종 1)에 태조이성계가 살던 집을 절로 만들어 흥덕사(興德寺)라 이름 붙이고 그 북쪽 문 위에 시렁을 만들어 밀교대장경 판본 1부를 봉안하였다. 현재 밀교대장경은 일부만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어서 그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은 알지 못한다.

밀교대장경판과 함께 하사된 『주화엄경(注華嚴經)』 경판은 문종 때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이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에서 새긴 120권의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의 목판이다. 당시 상인이었던 서전(徐戩)이 직접 그 판목을 고려로 옮겨왔다. 그 후 공민왕 때 이미충(李美冲)의 발원으로 권수에 변상도를 다시 새겨 붙였다. 이 목판은 일본 상국사에 하사된 이후 모두 소실되었지만 현전하는 인출본을 통해 그 구성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남권희, 「고려시대 『밀교대장』권9의 서지적 연구」, 『서지학연구』58, 한국서지학회, 2014.
  • 大隅和雄·中尾堯, 『日本佛敎史 中世』, 東京: 吉川弘文館,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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