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三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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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명당을 그 범위에 따라 3개로 나누어 표기한 것.

개설

풍수서마다 사물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다. 명당의 다른 이름으로서 내명당을 내양(內陽), 중명당을 중양(中陽), 대명당을 외양(外陽)이라 하여 삼양이라고도 한다. 삼양을 따지는 것은 그 안에 형성되는 혈이 진혈(眞穴)인가 가혈(假穴)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이 용어는 조선전기 풍수 논쟁에서 등장하지만 이후 사라진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서 삼양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 풍수에서 명당을 지칭하는 경우이며, 두 번째는 음력 정월의 봄기운을 의미한다. 동짓달에 처음 일양(一陽)이 생기고, 섣달에는 이양(二陽)이, 정월에는 삼양이 생겨난다는 의미에서이다.

풍수에서는 명당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하는데, 명당의 규모와 범위가 크기 때문에 이를 3분화하여 말한 것이다.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에서는 『동림조담(洞林照膽)』과 『명산론(明山論)』에 등장하며, 그 밖의 다른 풍수 서적에서도 등장한다.

그 밖에 풍수학인에 따라 삼양의 개념이 다르기도 하는데, 당나라 때의 천문지리학자 이순풍(李淳風)은 유수(流水)가 한번 교차하는 곳을 일양, 내명당을 이양, 외명당을 삼양이라 하였고, 또 다른 중국의 풍수학인 증문천(曾文辿)은 명당을 내양, 안산(案山)을 중양, 조산(朝山)을 외양(外陽)이라 하였다.

조선전기 『조선왕조실록』에서 삼양이 주제어로 떠오른 것은 왕릉 선정과 관련하여서이다. 궁궐이나 왕릉을 선정할 때 입지 선정에 참여하는 대신, 종친 그리고 지관들마다 땅을 보는 안목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장소를 두고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헌릉(獻陵) 옆에 세종이 자신의 수릉(壽陵)을 정하려 할 때 발생한 논쟁이다. 대모산이라는 하나의 주산 아래 두 개의 혈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이때 이곳에 수릉을 정하고자 하는 측은 삼양이 촉급[促]하지 아니하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킨다(『세종실록』 27년 4월 4일). 또한 조선초기 경복궁 터가 과연 진혈인가 가혈인가 논쟁이 발생하였을 때 풍수학훈도 최연원(崔演元)이 삼양이 촉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근거로 경복궁이 진혈임을 주장하였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변천

풍수에서 말하는 삼양이란 용어는 조선초기 명당 논쟁에서 언급되지만 임진왜란 이후 많은 풍수 서적의 유실과 동시에 중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풍수 서적의 영향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다. 그 대신 정월의 봄기운이란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참고문헌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梁湘潤 編集, 『堪輿辭典』, 台北, 民國 85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