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흉언(三手凶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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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경종 2) 노론 세력이 삼급수(三急手)를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하였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 내용이 흉악하다는 용어.

개설

삼수흉설(三手凶說)이라고도 하였다(『경종수정실록』 2년 9월 21일). 1722년 목호룡이 노론 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고변하였다. 당시 목호룡은 고변에서 노론 세력이 경종을 삼급수 또는 삼수(三手)라는 수단으로 시해하려고 한 것이라고 하였다. 삼수흉언이란 이런 목호룡의 고변이 흉악하다는 표현으로, 영조 즉위 이후에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741년(영조 17) 당시의 심문 내용을 기록한 삼수역안(三手逆案)이 소각되면서, 이 논리는 국시(國是)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삼수란 삼급수와 같은 표현으로, 노론 측이 경종을 시해하기 위해 준비했다는 세 가지 시해 방법이다. 보검(寶劍)을 가지고 궁장(宮墻)을 넘어 들어가 죽이려 했다는 대급수(大急手), 중국에서 사 온 환약(丸藥)을 약에 타서 먹게 하려 했다는 소급수(小急手), 유언비어를 퍼뜨려 경종을 헐뜯고 거짓 명령을 만들어 세자를 폐출(廢黜)하려 했다는 평지수(平地手)의 세 가지 수법(手法)을 말하는 것이다.

1722년 목호룡의 고변에서 삼급수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소상하게 제시되었다. 목호룡의 고변을 계기로 국청(鞫廳)이 설치되고 국문이 이루어지며 노론 사대신을 비롯해 노론 계열의 170여 명 이상이 화를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문 과정에서 당시 왕세제 즉 후일의 영조가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다.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목호룡이 고변에서 제시한 삼수의 설은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흉언(凶言)’이라 표현되었다. 당시 노론 세력들은 “삼수흉언”은 소론 세력들이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인원왕후(仁元王后)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무고(誣告)한 것이라고 하였다(『영조실록』 1년 1월 2일).

변천

영조는 즉위 이후 신임옥사(辛壬獄事)와 관련해서 화를 당한 노론 사대신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신원하며 신임옥사에 대한 혐의를 벗고자 하였다. 즉위 초부터 제기되던 삼수흉언이라는 평가는 1740년에 경신처분(庚申處分)을 통해서 노론 사대신을 완전히 신원하고, 다음 해인 1741년 삼수옥과 관련된 삼수옥안(三手獄案)을 모두 소각하면서, 조정의 국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 정만조,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소론 탕평에서 노론 탕평으로의 전환」, 『역사학보』111, 1986.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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