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만위(三萬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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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동북 지역에 설치한 위소 중 하나.

개설

삼만위는 1387년(홍무 20)에 명의 홍무제(洪武帝)가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위소(衛所)였다. 그러나 운영상의 문제로 명은 이듬해 삼만위를 요동(遼東)의 개원(開原)으로 옮겼다. 후일 명과 조선이 동북면 여진인의 소유권 다툼을 벌일 때, 삼만위의 백호(百戶) 등은 명의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영락제(永樂帝)의 힘을 빌려 1407년 당시 조선에 거주한 자신의 관하인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여 뜻을 이루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명 태조(太祖)주원장(朱元璋)은 1368년(홍무 원년)에 북벌군이 원(元)의 대도(大都)를 함락시키며 북중국을 석권하였다. 북쪽으로 밀려난 북원(北元)은 약 20년간 유지하다가 1388년에 명에 완전히 궤멸되었다. 명은 이 과정에서 1371년에 요동위(遼東衛)를 요양(遼陽)에 설치하며 명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점차 위소의 건설을 확대하여 북원 정권을 멸망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1387년에 삼만위와 철령위(鐵嶺衛) 등이 설치되었다.

변천

삼만위는 1387년(홍무 20)에 지금의 함경도 회령 일대의 알타리(斡朶里)에 설치되었다. 북원 정권의 궤멸이 가까워지자 명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장악하기 위하여 삼만위를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만위는 요동도사(遼東都司)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방어상에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듬해인 1388년에 명은 삼만위를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개원(開原)으로 이설(移設)하였다. 이후 명말에 폐지될 때까지 삼만위는 이곳에 위치하였다.

삼만위가 처음 설치된 곳은 두만강 유역의 회령 일대였다. 때문에 삼만위의 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은 이 지역 여진인과 깊은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종대 명과 조선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을 때에 삼만위의 천호·백호가 활약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4년 6월 10일). 한편, 명의 권위를 이용하여 삼만위 백호양합라(楊哈剌)는 개원으로 이주할 때, 자신을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거주하는 관하인의 쇄환을 요구하여 성공하였다(『태종실록』 7년 3월 15일)(『태종실록』 7년 4월 28일)(『태종실록』 8년 2월 7일). 한편, 조선은 여진 지역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친 삼만위의 사람들을 요동으로 보내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세종실록』 17년 9월 21일)(『세조실록』 11년 8월 5일)(『세조실록』 11년 9월 2일).

참고문헌

  • 『명실록(明實錄)』
  • 『명사(明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성호사설(星湖僿說)』
  • 李治亨 主編, 『東北通史』, 中州古籍出版社, 2003.
  • 남의현, 「元·明交替期 한반도 북방경계인식의 변화와 성격」, 『한일관계사연구』 39, 2011.
  • 박원호, 「鐵嶺衛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한국사연구』 136, 2017.
  • 박원호, 「鐵嶺衛의 位置에 관한 再考」, 『동북아역사논총』 13,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