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단시식문언해(三檀施食文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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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년(연산군 2) 불교에서 행하는 의식과 게송 등을 설명한 책.

개설

『삼단시식문언해(三檀施食文諺解)』는 1496년 불교에서 행하는 법사(法事)의 절차와 게송(揭頌 : 불교적 시의 한 형식) 등을 설명한 책이다. 본래 『진언권공(盡言勸供)』과 별개의 책이었지만 합본되어 보통 『시식권공언해(施食勸供諺解)』로 불린다. 『진언권공』의 판심 서명은 『공양(供養)』, 『삼단시식문』은 『시식(施食)』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합치면 『공양시식언해』가 되지만, 책 끝의 발문에는 『시식권공언해』라고 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성종(成宗)의 계비인 정현대비(貞顯大妃)가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원각사에서 이 책을 대대적으로 인경(印經)하자 조정 대신들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과 세상을 의혹시키는 불교를 전파하려는 것이냐며 적극 반대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7월 1일),(『연산군일기』 1년 7월 5일)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아니라며 조정의 반대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렇듯 인수대비와 정현대비의 지원을 받으면서 1496년(연산군 2) 내탕(內帑)으로 인경자(印經字)와 인경목활자(印經木活字)를 만들고, 먼저 『천지명양수륙잡문(天地冥陽水陸雜文)』을 찍어냈다. 또 두 대비는 학조에게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과 함께 이 책을 언해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발문(跋文)에 따르면 인수대비의 명령에 따라 『육조대사법보단경』 300부와 함께 이 책은 400부가 간행되었다.

서지 사항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각사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의 활자는 정교한 목활자인데, 불경 간행에만 쓰인 것이라 하여 인경목활자라 불리며, 서지학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육조대사법보단경』과 함께 15세기의 마지막 국어사 자료로서도 높이 평가된다. 특히 한자독음의 표기가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체계를 지양하고 현실화한 점이 그러하며, 이 밖에 문법·어휘 및 진언의 한글 음역 등도 특이하다. 원간본 이후로 한 번도 중간된 적이 없음에도 이 책이 전해진 것 역시 매우 드문 일이다.

일찍이 송석하(宋錫夏) 소장본이 소개된 일이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일사문고 소장본과 성암문고 소장본뿐이다.

구성/내용

‘불공(佛供)’의 개념은 가장 빠른 시기의 조어라고 할 수 있다. 신에게 공양하던 것을 부처님께로 전화되면서 쓰였다고 보이므로, ‘불공’이라는 말은 부처가 살았을 때부터 쓰였을 것이다. ‘삼보’ 개념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삼단’과 ‘삼위’의 개념은 신중과 하위의 아귀 개념이 등장한 이후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 문헌 가운데 『삼단시식문』과 합본되어 있는 『진언권공』에 ‘권공’이라는 명칭과 함께 불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삼단시식문』에는 상ㆍ중ㆍ하의 각 위에 따라 ‘불공’, ‘제천공양’, ‘고혼수향’이라고 하여 그 명칭이 다르게 나타난다. ‘불공’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의미로 상단의 불격에는 적합하다고 볼 수 있지만, ‘상단불공’은 상단이 곧 부처를 의미하므로 이중서술이 된다. ‘불공’하거나 ‘상(불)단공양’이 문법상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또 상단이 다시 보살이나 성중 등으로 세분되므로, 이 불공이라는 술어로 공양의 용어로 적합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시식의례(施食儀禮)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 불교 일반에서 말하는 시식의례는 ‘구병시식’ㆍ‘관음시식’ㆍ‘화엄시식’ㆍ‘전시식’과 같이 영적 존재에게 진언 등으로 음식을 변화하게 해 베푸는 의례이지만, 일반적인 시식의 연원은 ‘보시’에 있기 때문이다. ‘보시’는 초기 불교의 재가자나 대승 불교의 출·재가 수행자들이 행해야 할 첫째 수행 과목이다. ‘재’가 불교도가 승려들에게 올리는 제일 보시품은 음식이며, 음식을 보시하므로 ‘시식’이라고 하지만, 한국 불교에서는 영적 존재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을 ‘시식’이라고 하고, 스님들께 올리는 음식을 베푸는 것을 ‘재(齋 : 점심)’라고 하다가, 지금은 ‘공양’이라고 한다. 음식을 베푸는 것은 같지만, 음식을 받는 대상이 다르므로, 이 글에서의 시식은 편의상 영적 존재에게 음식을 베푸는 행위에 한정한다.

중국양(梁)나라 무제(武帝)에 의해 6세기 초에 처음으로 설행되었다는 수륙재회는 전형적인 시식의례였는데,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를 거치면서 제사 의례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고려 초 10세기에는 한국에도 도입되어 설행되기 시작했다. 1395년(태조 4) 태조(太祖)는 왕조 교체로 희생된 왕씨(王氏)들을 위해 개성의 관음굴, 삼척의 삼화사, 남해의 견암에서 수륙재를 베풀고 매년 정례화 하였으며, 1397년(태조 7)에는 왕실의 선대 조상을 위해 서울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세워 국행수륙재를 열었다. 이후 ‘기신재(忌晨齋)’로 설행되던 수륙재는 존속하여 숭불하려는 왕실 일부의 뜻보다 폐지하여 억불하려는 유신(儒臣)들의 강한 의지로 말미암아 국행의례의 자격을 잃고 내부 의례로 존속되고 있다. 국행의례였던 수륙재에 비해 ‘시식의문’에 의거한 일반적인 시식의례는 내부 의례의 성격이 짙은데, 하위의 영적 존재들을 청해 음식을 베푸는 순수한 시식의례이다. 국내 전승되고 있는 시식의문은 원(元)나라의 몽산덕이(蒙山德異)가 주를 붙인 『선교시식(禪敎施食)』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다. 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함경도 석왕사(釋王寺)의 『권공제반문(勸供諸般文)』이나 『작법귀감(作法龜鑑)』 등의 종합의례 서적에 편재된 ‘시식의문’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나 차례와 의문의 출입이 있다. 시식의문의 대략적인 구조는 시식의 대상을 청해[召請], 시식을 하고[施食], 봉송하는[奉送] 3단으로 이뤄져 있다. 이를 다시 소청은 창혼과 청혼으로, 시식은 ‘변식(變食)’과 ‘시식(施食)’으로, 봉송의 왕생은 정토업, 보례삼보, 행보, 봉송, 회향의 아홉 과정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삼단시식’을 설명한 한문에 대한 언해를 한 것으로 여기서 15세기 후반기의 국어의 쓰임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표기에서 ‘ㅸ’과 ‘ㅿ’이 나타나고, 각자병서는 ‘ㄸ’만 조금 나타나고, 나머지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합용병서 ‘ㅽ’, ‘ㅺ’, ‘ㅳ’, ‘ㅴ’ 등이 쓰인다. 종성은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대로 잘 따르고 있으며, 사잇소리는 ‘ㅅ’으로 표기된다. 구개음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방점도 잘 쓰이고 있다.

둘째, 높임법으로 ‘낮춤’을 나타내는 ‘-놋다’, ‘-리라’, ‘-(이)라’와 같은 종결 형식이 쓰이는가 하면, ‘높임’을 나타내는 ‘-소서/-쇼서’, ‘-다’와 같은 종결 형식도 나타난다.

셋째, 불교 용어와 불교의 시식에서 쓰이는 음식과 제물의 이름이 많이 쓰였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김정수, 『역주 진언전공ㆍ삼단시식문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8.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안병희, 「진언전공ㆍ삼단시식문 언해 해제」, 『진언전공ㆍ삼단시식문 언해』, 명지대학교, 1978.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