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적(削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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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리들의 명단이나, 유학자의 명부인 유적(儒籍)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유벌(儒罰)의 하나로, 부정이나 비리가 있는 조정의 관리를 탄핵하던 방법.

개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삭적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부터 삭적이 관행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리들의 명단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이나, 성균관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청금록(靑衿錄)』 등에서 그 이름을 삭제당하는 것은 명예를 존중하는 조선사회에서 최고의 불명예였다. 삭적은 이미 작성된 명단에서 이름을 지우는 방식으로 부정과 비리를 행한 관리들을 징계하는 조처였다. 처음에는 조정에서도 시도가 되었으나 점차 성균관 유생들의 전유물처럼 굳어갔다. 1674년의 실록 기사에 “당론(黨論)이 생긴 뒤로부터 공정한 판단[是非]이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강한 힘으로 약한 자를 제어함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을 이루어서 여태까지 일정 기간 동안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벌[停擧]이 반드시 모두 공론(公論)을 거쳐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부황(付黃)과 삭적에 이르러서는 곧 유생(儒生)이 하는 것이니, 조정에서 간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5일)라고 한 기록은, 부황이나 삭적이 유생들이 주도하는 징벌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 및 특징

광해군대 정국의 최고 실세인 정인홍(鄭仁弘)은 성균관 유생들의 연명 상소로 『청금록』에서 삭적되었다. 스승인 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출향하려 한 것이 유생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유생들에 의한 삭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있었다. 『응천일록(凝川日錄)』의 1635년(인조 13) 5월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에서는 “유생이 조정 관리를 삭적하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사안인데 죄악의 경중도 따지지 않고 그냥 이 버릇을 따른다면 조정 선비의 관직 등용도 유생의 손에 매이게 됩니다. 이것이 어찌 뒷날의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유생들이 주도하는 삭적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1650년 태학생 박세채 등의 상소에서 “대저 재벌(齋罰) 중에 가벼운 것이 손도(損徒)이고 무거운 것은 삭적하거나 부황하는 것입니다”(『효종실록』 1년 7월 3일)라고 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처벌 수위를 드러내었는데, 이 중에 부황이 최고의 처벌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삭적이 향약의 규례에서 유래한 것임을 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1681년 실록 기사의 “지금 이후로는 유생을 벌할 때에는 손도·삭적 같은 것은 한결같이 향약의 뜻을 본떠서 과실을 서로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습니다”(『숙종실록』 7년 6월 2일)라는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 『응천일록(凝川日錄)』
  • 설석규, 『조선시대 유생상소와 공론정치』, 선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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