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四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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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을 할 때 해당 토지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지형지물을 기록한 표시.

개설

사표는 왕릉이나 강무장 등 특정한 지역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조형물을 세우거나 혹은 각 군현의 위치나 경작지의 위치 등을 설명하기 위하여 동서남북에 위치한 지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주로 양전(量田) 때 각 경작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동서남북의 지형지물을 기록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의 양전은 절대 면적을 측정하여 기록하는 경무법(頃畝法) 대신 단위 토지의 생산량을 참작하여 측량하는 결부법(結負法)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토지 생산성에 따라 일정 면적의 토지를 3등 혹은 6등으로 분류하고 각 등급에 해당하는 기준에 따라 결부를 측정하였다. 이렇게 측정한 토지는 5결을 기준으로 자호(字號)를 부과하여 1정(丁)으로 편성하였다(『세종실록』 18년 9월 2일). 자호는 천자문의 순서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양전 방식은 1결당 같은 양의 조세를 수취할 수 있다는 재정 운영상의 편의성이 있지만 불편한 점도 존재하였다. 즉, 생산성이 변하게 되면 다음 양전 시에 토지의 면적에 변동이 생기고, 이에 따라 자정을 구성하는 토지도 계속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정 표시만으로는 단위 토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점 때문에 양안을 작성할 때 반드시 토지의 경작자인 기주(起主)를 표시하고 아울러 동서남북에 위치한 지형지물, 즉 사표를 함께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면 단위 토지의 면적 측정량이 변동되더라도 토지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표의 기록은 국가가 재정적 이유로 토지의 용도를 변경하거나 혹은 민간에서 토지 소유권 내지는 경작권과 관련된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오늘날 고정된 면적의 토지에 지번을 부여하여 관리하는 방식과 달리 토지 생산력의 변동에 따라 자정이 바뀌는 체제가 조선의 양전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에서 사표의 기록은 결부제적 방식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변천

결부법에 의한 토지 측량 방식은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고, 대한제국기의 광무양전 시에도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양안에 사표를 기재하도록 하는 관행 역시 조선시기 내내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