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군(莎草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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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에 떼를 입혀 가다듬는 일을 하는 역군.

내용

사초군(莎草軍)은 산릉(山陵)을 새로 조성하거나 수리할 때, 산릉에 떼를 입혀 잘 가다듬는 일을 하는 역군이었다. 조선후기 산릉역에서는 도성 주민이 상여를 메는 여사군(轝士軍)으로 징발되어 사초군의 일까지 수행하는 일이 많았다. 대체로 단기간의 부역노동에 속하였다. 산릉역일 경우, 사초군의 수는 1,000명에 달하였으며, 산릉을 수리하는 역사에서는 300여 명을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공인계(貢人契)에서 자원하여 사초군의 일을 부담하는 일도 있었다. 1673년(헌종 14)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遷陵役)의 예를 보면, 능상(陵上)에 깔 사초 6,000장을 모화관(慕華館)에서 떼어 올 때, 농민 800명을 징발하되, 모군의 예에 따라 품삯을 지불하였고, 이를 능상으로 옮겨 오는 일은 상번군(上番軍)인 도방군(到防軍)을 시켜 사역하였다. 모두 52,000여 장의 사초가 조달되었으며, 여기에 면포 520여 필이 지불되었다. 사초를 덮는 일을 주도하는 사초장(莎草匠)은 산릉도감 삼물소(三物所)의 장인을 불러 썼다.

용례

知敦寧李宗城上書 略曰 戶錢之不可行 其說有四 一曰不均也 二曰不足也 三曰增田結之役也 四曰失士夫之心也 (중략) 何謂增田結之役也 我國民役 田與戶二者而已 田賦則固有定制 而烟戶之役 名色至繁 至於海西 關東 則一戶所出殆過田賦 至於畿內 則雉鷄 柴草 氷丁之外 有別星則以釜鼎器皿而收錢焉 以延逢前排而受錢焉 有喪葬則以擔持 雜色軍而收錢焉 以造墓莎草軍而收錢焉 通諸路言之 雖最輕歇處 一年所收以錢計之 戶不下四五十文矣 (하략) (『영조실록』 26년 6월 22일)

참고문헌

  •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孝宗寧陵遷陵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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