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암(獅子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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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원당(願堂)으로, 충청북도 보은군 법주사의 산내 암자.

개설

사자암(獅子庵)은 충청북도 보은군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산내 암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중사자암(中獅子庵)은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되어 조선시대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원당(願堂)이었다. 중사자암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폐허화 되었지만, 1950년대 이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원

법주사의 산내 암자인 사자암은 원래 세 곳의 암자였다. 상사자암(上獅子庵)과 하사자암(下獅子庵)은 오래 전에 폐허가 되었고, 현재 중사자암만 남아 있다. 720년(신라 성덕왕 19) 의신 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고, 이후 고려시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변천

(1) 조선시대

중사자암에 대한 기록은 오랫동안 전하지 않다가 조선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중사자암이 원종(元宗)의 원당(願堂)이라고 했다(『영조실록』 5년 10월 1일). 원당 또는 원찰(願刹)은 특정한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말한다. 영조 때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속리산의 중사자암은 원종대왕(元宗大王)의 원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종은 조선선조의 아들 정원군(定遠君)으로 인조의 생부가 되는 인물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 1627년(인조 5)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이 때문에 중사자암은 인조의 후원에 의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중사자암은 1641년(인조 19)에 재건되었는데, 이때 인조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의 청에 따라 지선(智禪)이 일을 감독하고 낙성일에 능원군이 전답을 희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757년(영조 33)에 중사자암을 중수하였는데 궁감 이수창과 주지 현익이 감독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837년(헌종 3) 신영원과 총섭 하운을 파견하여 다시 중수했다. 1887년(고종 24) 중사자암을 다시 크게 중수한 사실이 있다. 조선시대에 중사자암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상주하는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도 유명했다.

(2) 근현대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등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사찰은 일시 폐사되었다. 기존에 화려했던 전각들은 모두 폐허로 변했다. 현재의 중사자암은 1957년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이후 1985년 종현이 사찰을 중수했으며 1986년에는 삼성각(三聖閣)을 새롭게 건립했다. 현존하는 당우로 법당과 삼성각이 있으며,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1896년에 제작한 후불탱화(後佛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암자의 서편에는 인공으로 깎은 듯한 감투바위가 있는데, 창건 당시의 산신당(山神堂) 터였다고 한다. 그 아래편 일대는 조선선조의 원당지(願堂址)로서, 6·25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 초석만 산재한다.

문화재

중사자암 동종(中獅子庵 銅鐘, 보은 법주사 동종)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7호였으나 2014년 보물 제1858호로 지정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제작된 동종으로 높이 76㎝, 입지름 48.1㎝ 크기의 청동 재질이다. 고려 종의 전통 양식을 가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중사자암 중창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종신 하부의 음각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 시주자 등 제작에 관여한 사람을 알 수 있다. 상대(上帶)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있고 하대(下帶)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조선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동종은 속리산 문장대 아래의 중사자암 동종으로 제작되었다가 법주사로 옮겨졌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가람고(伽藍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