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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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90년 경에 만든 역사서.

개설

『사기(史記)』는 기원전 90년 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역사서이다. 총 130권이며,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대를 따라 평면적으로 기록하는 편년체(編年體)가 아니라, 역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부각하는 기전체(紀傳體)로 작성하였다.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후한(後漢)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으며,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편찬/발간 경위

『사기』를 지은 사마천이 태어나고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걸쳐 한나라(漢) 무제(武帝)의 치세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짓는다는 구상은 이미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 때부터 존재했으나, 사마담은 자신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자 분개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책 짓는 일을 완수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자신의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고대 위인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지금의 굴욕을 무릅쓰고서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에 몰두했고, 기원전 91년경 『사기』는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이것을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술이 『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선제(宣帝)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손자 양운(楊惲)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五帝) 이전의 삼황(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사기』를 중요시 여겨, 정치에서 활용하였다. 특히 세종(世宗) 대에는 국가사업으로 『사기』를 인쇄하여 반포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1월 24일),(『세종실록』 7년 11월 8일) 아울러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사기』는 역사를 상고할 때마다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성/내용

『사기』는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하(夏) · 은(殷) ·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제국의 통일과 와해를 거쳐,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기』가 작성되던 한(漢)나라는 사상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인류사의 대변혁기라 할 수 있는데, 『사기』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단순한 사료로서가 아니라 사상서, 문학서로서도 널리 읽히는 것은 사마천의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된 인간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듯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전체’로 쓴 『사기』의 모습은 『한서(漢書)』 이후의 중국 역사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마천의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으로 묘사된 『사기』에 버금가는 저술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전설시대에서 한나라 때까지의 왕조 흥망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본기는 「오제(五帝)본기」, 「하(夏)본기」, 「은(殷)본기」, 「주(周)본기」, 「진(秦)본기」, 「진시황(秦始皇)본기」, 「항우(項羽)본기」, 「한나라의 고조(高祖)본기」, 「여후(呂后)본기」, 「효문(孝文)본기」, 「효경(孝景)본기」, 「효무(孝武)본기」의 12권으로 되어 있다. 각 권말에는 사마천의 촌평이 붙어 있는데, 여기에는 진나라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기원전 202년에 한나라의 고조유방에게 패한 항우의 최후도 묘사되어 있다. 항우는 왕조를 수립하지는 못했으나, ‘본기’에 편입되어 있다.

‘표(表)’는 연표(年表) 부분으로서, 이것도 평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왕조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 전국시대의 7국, 한나라 때의 제후, 왕족, 중신 등 10권으로 분류해 복잡한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특히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기까지(기원전 209~기원전 202) 격동의 8년간을 한 권에 정리하는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서(書)’에서는 예제(禮制)와 역법, 천문, 법제, 치수공사(治水工事), 경제 등의 제도 연혁을 8권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고대 중국은 왕조 아래 제후를 두고, 그들이 각지의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8세기 이후에 이르면 주왕조의 통제력은 점차로 약해지고, 제후의 영지는 사실상 독립국의 형태를 띠고 서로 대립하며 패권을 다투게 된다. 이 제후의 계보와 역사를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세가’ 30권이다. 한편 공자는 제후가 아니지만, 특별히 세가에서 다루었다.

‘열전(列傳)’에서 사마천은 사상가와 정치가, 장군, 관리, 협객, 상인, 시정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전기를 열전 70권으로 묶었다. 제1권 「백이열전(伯夷列傳)」은 역사의 파도에 흔들리며 살아야 했던 인간의 마음을 주제로 했고, 제69권 「화식열전(貨殖列傳)」은 경제와 경제인의 업적을 들었는데(제70권은 사마천 자신의 전기), 전체적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하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에 대한 질문이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班彪)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을 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김이식, 『『사기』급기전기문학지연구』, 국립대만사범대학 국문연구소, 2005.
  • 서해문집 편집부 엮음, 『사기를 이해하는 백과사전』, 서해문집, 1996.
  • 장석만,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사기 열전(史記 列傳)』, 이른아침, 2005.
  • 호승희, 『사기열전』, 타임기획,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