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승(寫經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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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으로 불교 경전을 베껴 쓰는 일을 하는 승려.

개설

초기 불교에서 불교 경전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은 불경을 널리 보급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후 인쇄 기술이 발달하고부터는 죽은 이의 명복과 자기 자신의 복을 기원하거나 국가의 발전을 빌기 위한 신앙적 목적으로 유행하였다. 기원 전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의 수지(受持), 독송(讀誦)과 함께 필사의 공덕이 강조됐는데, 이 무렵부터 사경을 하는 것을 큰 공덕으로 여기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승려나 재가신도들에 의해 많은 사경이 이루어졌고, 점차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승려들도 나왔다. 이들을 사경승(寫經僧)이라 한다.

내용 및 변천

(1) 중국의 사경원

후한(後漢)시대인 179년에 지루가참(支婁迦讖)에 의해 한역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사경의 공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전부터 사경의 전통이 있었다. 전문적인 사경원(寫經貝)이 양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조시대 이후로, 이때부터 국가와 사원에서 수천권의 대장경 사경이 이루어졌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는 사경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대승불교에서 사경을 통한 공덕을 장려했다고 할 수 있다. 당대까지 이어진 사경의 유행은 송대 이후 목판본이 보급되면서 감소하였다.

(2) 조선시대 이전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의 발문 조성기에, 전문적인 경필사가 초청되어 화엄경 제작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경필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사경을 전문으로 하는 사경원(寫經院) 또는 사경소(寫經所)를 두었으며 전문 사경승들이 경전을 서사하였다. 고려의 사경승은 사경 실력이 뛰어나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충렬왕대부터 원나라에서 사경승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많게는 100여 명에 이르는 사경승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원으로 간 사경승 중에는 유가종(瑜伽宗) 승려들이 많아 고려말 유가종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1290년(고려 충렬왕 16) 100여 명의 사경승을 데리고 원에 갔던 혜영(惠永)은 금니(金泥)로 대장경을 사경하고 원의 세조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으며, 귀국 후 국존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3) 조선시대

조선전기인 1425년(세종 7) 사헌부에서 『법화경』을 금과 은으로 쓴 사경승 성준(性濬)과 작두승 신생(信生)을 금령 위반으로 보고한 기록이 있어 이 시기까지 전문 사경승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7년 11월 15일). 이후 불심이 깊었던 세조는 즉위 3년 만인 1457년에 의경세자가 죽자 내경청(內經廳)을 설치하여 불경을 필사하고 편찬하게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사경승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말기인 1880년(고종 17) 사경승인 원기(元奇)가 고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민씨의 발원으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서사하였다. 또한 그는 1896년(고종 33) 선암사에서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6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사열전(東師列傳)』
  • 권희경, 『고려사경의 연구』, 미진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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