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창(分倉)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전세 수납 시 규정된 창고 수납 순서를 어기고 곡식을 함부로 옮기는 폐단.

개설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가 시행되면서 정부 각사(各司) 소속의 위전(位田)을 국용전으로 통합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에 따라 전세 수납의 절차도 간소화되었다. 국가에서 지정한 몇 군데 창고에 전세를 우선 납입하고, 지정된 창고가 모두 차면 나머지는 군자감(軍資監)의 세 군데 창고에 나누어 납입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군자감의 세 창고에 나누어 납입하는 것을 본래 분창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창고 납입의 순서를 어기고, 서리들의 편의에 따라 창고 곡식을 나누어 받거나 옮기는 폐단이 일어났다. 이를 분창 혹은 분창지폐(分倉之弊)라고 불렀다(『광해군일기』 8년 9월 20일).

내용 및 특징

국용전제 시행과 함께 규정된 전세 수납 절차에서 우선적으로 납입해야 할 창고는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사도시(司䆃寺)·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소격서(昭格署)·양현고(養賢庫)의 창고였다. 이들 창고가 다 차면 나머지 전세들은 모두 군자감의 세 분감(分監)에 나누어 납입하도록 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전기 분창이란 용어는 위에서처럼 군자감의 세 분감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선조실록』 40년 6월 29일).

변천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서 수취하는 전세의 양이 감소하면서, 전세만으로 창고를 채우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에 각 창고의 서리들은 전세가 서울에 도착하면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이 속한 창고에 곡식을 우선적으로 납입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를 분창 혹은 분창지폐(分倉之弊)라고 하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분창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관원의 녹봉은 작미(作米)한 쌀로 주고, 서리들의 급료는 세미(稅米)로 지급하였다. 관원의 녹봉을 관리하는 광흥창에 우선적으로 세곡이 납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창고곡의 액수를 다 채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광해군일기』 8년 9월 20일). 이러한 분창의 폐단은 주로 17세기 초반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 부족한 전세만으로 창고를 채우기 어려웠던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후 인조대부터 본격화된 대동법 시행 논의는 공물로 인해 나타난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지만, 국가의 미곡 확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