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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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 한성부의 북부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립 학교.

개설

북학은 예조 속아문인 사학의 하나였다. 북학은 고려 말에 설치된 북부유학(北部儒學)을 계승한 것으로, 조선 초 세종대 후반까지는 존속하다가 문종 연간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현종 연간에 복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북학의 전신은 고려 말에 설치된 북부유학이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이를 계승해서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부유학을 포함한 한성부 오부(五部)의 유학은 처음에는 독립된 공간을 갖지 못하고 주로 사찰을 빌려 사용하였고, 1411년(태종 11) 남학(南學)의 건립을 시작으로 이후 1435년(세종 17)까지 중학(中學), 서학(西學), 동학(東學)이 순차적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북부학당만은 독자적인 학당이 건립되지 못하고 부내의 관광방(觀光坊: 현재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건립된 중부학당을 이용하다가 소멸되었다. 북부학당이 폐지된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종 연간까지는 존속이 확인되었고[『세종실록』 30년 11월 28일], 문종대 이후에는 그 존재가 전혀 확인되지 않아 세종 말에서 문종 초의 어느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학계 일부에서는 북부학당 자체가 설치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일시적으로 존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학이 이렇게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폐지된 것은 중학과의 관련성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중학이 위치한 곳은 북부 관광방이기에 중학이 설치된 1422년(세종 4) 이후 중부와 북부의 자제들이 주로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북부학당은 독자적인 학당이 없어도 교육이 가능하였고, 이 점에서 독자적인 학당이 건립되지 않음은 물론 학당도 중학에 통합되면서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직 및 역할

북학의 조직은 동학을 비롯한 사부학당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본다면 성균관 관원이 겸직하던 종6품의 교수(敎授)와 정9품의 훈도(訓導)가 배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학은 일시적으로 존속하다가 전임학관제가 정착된 1466년(세조 12) 이전에 폐지되었기에 다른 사학과는 달리 전임제를 경험하지는 못하였다. 동학 등과 동일하게 10세 이상의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1661년(현종 2)에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이원(尼院)을 훼철하면서, 찬선(贊善)송준길(宋浚吉)이 이곳에 다시 북학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현종실록』 2년 2월 12일]. 이에 따라 남구만(南九萬)을 북학 교수로 삼아서 북학건립공사를 시작하였으나, 흉년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오경택, 「조선 중중대 사부학당 진흥책에 관한 일고찰」, 『북악사론』9, 2002.
  •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1961.
  •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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