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환(部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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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융청이 관할하는 북한산성의 창고에서 직접 운영하던, 서울의 5부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환곡.

내용

환곡은 본래 굶주린 백성의 진휼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원곡을 보존하기 위하여 걷던 이자인 모곡(耗穀)을 국가 재정의 재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여, 18~19세기에는 부세적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처음에는 호조와 상평청·진휼청에서만 환곡을 운영하던 것이 이후에는 비변사·균역청·선혜청 등의 중앙아문과 총융청(摠戎廳)·장용영과 같은 중앙의 군문, 그리고 각 도의 감영·병영·수영·통영(統營) 등도 모두 환곡을 운영하여 재원을 마련하였다.

부환은 총융청에서 관리하는 북한산성의 여러 창고에서 서울 5부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환곡이었다. 1712년(숙종 38) 북한산성의 축조 이후 곧 경리청(經理廳)을 두고 예하 여러 창고의 군량미 확보와 관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1747년(영조 23) 경리청을 폐지하고 총융청에서 북한산성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산성 예하 각 창고의 관리도 총융청으로 이관되었다. 부환의 설치 시점은 자료를 통하여 파악하기 힘든데, 1794년(정조 18)의 정민시(鄭民始)의 발언에 따르면 1749년(영조 25) 절목에는 환곡 운영에 폐단이 없었으나 중간에 부환을 설치하여 폐단이 따르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 (『정조실록』 18년 1월 9일) 영조 25년에서 정조 18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환곡의 운영은 각 아문에서 해당 고을에 곡식을 맡겨 운영하는 형태였지만, 부환의 경우는 서울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산성에서 직접 환곡을 분급하고 환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총융사정민시의 같은 발언에 의하면, 부환을 분급 시에 보주인(保主人)들이 성안의 무뢰배들을 꾀어 많은 양을 분급한 뒤, 갚을 때가 되면 이를 친족들에게 물게끔 하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부환을 혁파하고, 이를 경기 각 고을에 분급하여 운영하게 하였는데, 이때 시정한 내용이 『만기요람』 총융청조에 전하고 있다.

한편 부환과 함께 경기 백성들에게 분급되는 환곡으로 보환(保還)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으며, 1794년 부환과 함께 혁파되었다.

용례

摠戎使鄭民始啓言 北漢糴弊 罔有紀極 所謂臥還 反秩 私分 都受 防納 移施 代點 虛逋等諸弊 無所不有 今年之新還 多是積年仍反 不得不徵族 實爲都民難支之端 此專由於保還 部還之致 每年應分近二萬石 而專委於六七十保主人之手 各人名下 少不下數百石 部還 則保主人輩 詐誘城內無賴之類 多數受出 幷歸浪費 及其捧糴 徵於一族 此弊不革 則餉穀必無餘存矣 (『정조실록』 18년 1월 9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