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지(夫汝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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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원의 맞은편에 있던 여진 번호 부락.

개설

부여지는 함경도 경원(慶源)에 속한 여진 번호(藩胡) 부락 중 하나였다. 그 추장은 양쌍아(揚雙阿)이고, 임진왜란 이후 번호가 조선을 공격할 때 선두에 서던 강한 부락이었다. 1603년에 오랍(烏拉)의 포점태(布占泰)가 동관(潼關) 등을 비롯한 조선의 두만강 유역과 번호 부락을 공격할 때, 현성(縣城)에서 대항하였다.

변천

부여지는 두만강 건너편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지 부락은 임진왜란 이후 두만강 유역의 번호가 조선의 성을 함락하거나 포위할 때 언제나 선두에 나설 정도로 강력한 부락이었다. 따라서 당시 북병사(北兵使)였던 정현룡은 이들을 공격하여 국가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정현룡은 1595년(선조 28) 2월에 이들을 공격하겠다고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8년 1월 15일).

이후 1603년 8월에 오랍의 포점태가 두만강 유역을 공격할 때, 조선뿐만 아니라 부여지를 비롯하여 모로(毛老)·남라이(南羅耳)·후을온(厚乙溫)·황고라이(黃古羅耳) 등 주변의 번호 부락까지 공격하였다. 이에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경원의 맞은편인 현성에 모여 포점태군에게 대항하였고, 포점태군은 부여지에 군대를 주둔하였다(『선조실록』 36년 12월 28일)(『선조실록』 36년 12월 28일)(『선조실록』 36년 12월 28일).

1605년(선조 38)에 포점태는 다시 군사를 보내 두만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5월에 북병사김종득은 3,000명을 거느리고 당시 포점태군이 주둔한 건가퇴(件加退)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포점태가 우위를 점하였고, 조선은 번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였다. 이듬해 포점태군은 두만강 유역 번호들을 본격적으로 공략하였고, 번호들은 현성에 모여 저항하였다. 이때 부여지의 추장 양쌍아 부자(父子) 등 20여 명도 참전하였다(『선조실록』 39년 7월 11일).

현성 등의 번호는 여러 차례에 거쳐 방어하였으나, 포점태의 계속된 공격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이듬해에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에게 보호를 요청하였다. 결국, 누르하치는 같은 해 3월에 두만강 유역의 번호를 혁도아랍(赫圖阿拉)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부여지 부락민들도 누르하치에게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북관지(北關志)』
  • 『북로기략(北路紀略)』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서병국, 『宣祖時代女直交涉史硏究』, 교문사, 1970.
  • 稻葉岩吉, 「淸初の疆域」, 『滿洲歷史地理』 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