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사(奉元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영조대에 의소묘의 원당으로 조성된 절.

개설

봉원사(奉元寺)는 신라말 도선 국사가 반야사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고, 고려말 태고보우가 중창하였으며, 태조이성계가 삼존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영조대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큰아들인 의소세손이 태어난 지 3년 만에 죽자 반야사가 있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이때 사찰명을 봉원사로 바꾸고 의소묘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영조가 봉원사의 현판을 하사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봉원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안산(鞍山) 또는 금화산(金華山)으로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665년(현종 6)에 정지익(鄭之益)이 찬술한 「봉원사사적기(奉元寺事蹟記)」에 의하면, 절의 창건은 889년(신라 진성여왕 3)에 도선(道詵) 국사(國師)가 어느 재가자로부터 집을 희사(喜捨) 받아 반야사(般若寺) 혹은 반야암(般若庵)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봉원사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말부터 다시 시작한다. 태고보우(太古普愚)가 반야사를 중건하여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미니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명찰은 한강 동북에 있다’고 찬탄하면서 반야사를 금화사(金華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즉 금빛의 화려함을 가진 사찰이라는 의미로 금화사라고 부른 것이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태조이성계가 삼존불(三尊佛)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태조가 승하한 후 진영을 안치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 그 후의 사세(寺勢)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임진왜란 당시에 병화(兵火)로 전각들이 불탔던 것을 지인(智仁) 대사가 중창하였고, 1651년(효종 2)에 화재가 나서 전각들이 다시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극령(克齡)·도암(道庵)·휴엄(休嚴) 등이 중건하였다. 그리고 1663년(현종 4)에 현종이 반야사를 보호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반야사가 봉원사라는 명칭으로 바뀌고 현재의 자리로 옮긴 시기는 영조대인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의 큰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이 태어난 지 3년만인 1752년(영조 28)에 요절하자 의소묘(懿昭墓)를 조성하고 봉원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았다(『영조실록』 31년 11월 20일). 그런데 당시 반야사가 있던 자리에 의소묘를 조성하고 봉원사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당시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앞장서서 전각들을 새로 지었으며 영조로부터 ‘봉원사(奉元寺)’라는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사찰명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의소묘는 현재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옮겨져 의령원(懿寧園)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또한 봉원사는 사도세자의 생모였던 영빈이씨(暎嬪李氏)를 안장한 수경원(綬慶園)의 원당이었다고도 한다. 수경원은 1764년(영조 40)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의 세브란스병원 뒤쪽에 조성되었다가 1970년에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조선후기 봉원사는 한양에 살던 여러 유생들이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연암박지원(朴趾源)은 「허생후지(許生後識)」라는 글에서 스스로 20살에 봉원사에서 글을 읽었다고 하였고, 이덕무(李德懋)는 「봉원사」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이들은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봉원사를 자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3) 구한말~근대

1855년(철종 6)에는 은봉(銀峯)과 퇴암(退庵) 등이 법당을 중건하였으며, 1894년(고종 31)에 성곡(性谷)과 금계(錦溪) 등이 약사전을 새로 신축했다. 또 1933년에 주지 안심산(安心山)이 대방(大房)을 중수하고, 1939년에 주지 김영암(金英庵)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했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4 : 서울』,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4.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