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사(福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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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신미 대사가 머물렀던 왕실원당으로,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에 있는 절.

개설

복천사(福泉寺)는 신라 성덕왕대에 진정 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증통 국사가 중창하고 자정 국존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혜각존자 신미 대사가 주석할 때 번창하였다. 신미 대사는 김수온의 친형으로 세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세종이 승하한 후에는 안평대군이 문종의 지원을 받아 복천사를 중건하였다. 세조는 친히 방문하여 신미 대사를 만났다. 그러나 신미 대사가 입적한 후에는 왕실의 지원이 끊어졌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에 있는 복천사의 절 이름은 절의 동쪽 돌 사이에서 샘물이 쏟아져 나와 식수로 쓰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진정(眞定) 선사가 창건하였고, 그 후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영심(永心) 선사가 중건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918년(고려 태조 즉위)에 증통(證通) 국사(國師)가 중창하고, 1107년(예종 2)에 자정(慈淨) 국존(國尊)이 중수하였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초기에는 왕실의 원당으로서 크게 중창되었지만 후기에는 왕실과의 왕래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초기에 중창되었던 것은 혜각존자(慧覺尊者)신미(信眉) 대사가 주석하였기 때문이다. 신미 대사는 집현전 학자였던 김수온(金守溫)의 친형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출가하였는데, 세종이 크게 신임하여 자주 궁으로 불러 불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세종은 집권 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불교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하고 불교에 관한 제반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인 승록사를 폐지하였으며 궁궐 내에 있던 내불당(內佛堂)을 철폐하는 등 불교를 억압하였으나, 재위 중반부터는 불경을 즐겨 읽고 불교를 깊이 신행하였다. 이때 김수온과 신미 대사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세종실록』 31년 2월 25일). 세종은 자주 신미를 불러 불사를 주관케 했으며 극진히 예우하였다(『세종실록』 32년 1월 26일). 이로부터 신미 대사가 머물던 복천사는 왕실의 원당이 되었고 문종과 안평대군의 보시가 이어졌다.

세종이 승하한 후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희사하여 복천사를 중건할 때 문종이 단청하는 도구를 지원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복천사의 법당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백성들에게 재목과 기와를 운수하게 하는 폐단이 있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30일). 하지만 문종은 공사가 끝나자 안평대군을 보내 살피게 하였으며, 안평대군은 불상을 주조하여 옮겨 갔다(『문종실록』 1년 9월 13일).

또한 세조는 신미 대사가 머물고 있던 복천사를 직접 방문하여 전지와 노비 등을 하사하였다(『세조실록』 10년 2월 28일). 복천사에 대한 왕실의 관심은 성종대까지 매년 소금 93석 5두를 지원하는 등 지속되었으나 신미 대사가 입적하고 난 후 왕실과의 왕래가 끊어지더니 마침내 중종대에 노비 80명을 성균관으로 속공하는 등(『중종실록』 13년 3월 5일) 지원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로 복천사에 관한 기사는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후기 복천사에 관한 기록은 사찰의 상량문 등에서 보인다. 1733년(영조 9) 겨울에 화재가 나서 전각과 불상이 모두 소실되자 승려 천신(天信)과 탁융(卓融)이 중심이 되어 사원을 중창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새로 조성하였다. 그 후 1803년(순조 3)에 포유(抱瑜)가 퇴락한 극락보전을 중수하였다. 현재는 법주사 산내 암자로서 복천암이 되어 있다.

참고문헌

  • 정관 효담 편, 정법안 집필, 『복천사지』, 속리산복천암, 2011.
  • 민덕식, 「속리산 복천암과 신미선사」, 『충북사학』제21집, 충북사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