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군(復讐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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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심하 전투 때 적군에 의해 친척을 잃은 유족들이 봉기하여 편성한 의병.

개설

임진왜란 중 비변사의 건의로 설치된 의병 부대이다. 일본군에게 부모, 처자, 형제 등을 잃은 유족을 모집 대상으로 하였다. 조정은 복수청(復讐廳)을 설치하고 전국에서 군사와 군량미를 모집하였으나 많은 민폐만 유발하였다. 훈련과 기강의 부족으로 인하며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전 이후 해체되고 말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서 전사한 자의 후손들로 구성된 복수군이 조직되어 참전하였다.

담당 직무

강화 협상의 파탄으로 일본군의 재침이 예상되던 1596년(선조 29) 말 비변사의 건의로 일본군에게 부모, 처자, 형제 등을 잃은 유족들을 대상으로 의병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의 의병 부대가 패배하여 흩어진 이후, 그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상복을 입은 채로 지휘한 사례가 있었으나(『선조수정실록』25년 10월 1일), 복수군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조직된 것은 이때가 시초였다. 병조에서 일종의 모집 공고문인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한양의 지원자를 모집하여 그중 능력이 뛰어난 자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고, 지방에도 관련 내용을 알리는 문서를 보내어 복수군을 모집하였다. 한양에서는 1597년(선조 30) 초 김시헌(金時獻)과 송순(宋諄)의 주도로 결성된 복수군 700명 이상이 남쪽 교외에서 모여 회맹식(會盟式)을 거행하였다(『선조실록』30년 2월 13일). 복수군은 남녀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참여할 수 있었는데, 적에게 친척을 잃은 조정 신하와 종실(宗室)을 비롯하여 상인, 아전, 장인(匠人)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부대를 통솔할 복수청을 설치하고 김시헌 등을 전국으로 보내어 군사와 군량미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폐를 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훈련과 기강의 부족으로 인하며 실전에서도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도주하거나 관망하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 해체되었다.

변천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정주성(定州城) 전투에는 김양언(金良彦)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서 전사한 자의 후손들로 구성된 500명의 복수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겸사복(兼司僕)김택룡(金澤龍)이 심하 전투에서 전사한 자의 후손 244명을 모집하여 복수군으로 참전하였다(『인조실록』14년 3월 9일)(『인조실록』14년 5월 21일).

참고문헌

  • 崔永禧, 『壬辰倭亂中의 社會動態』, 韓國硏究院, 197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