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녕당(福寧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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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생모인 복녕당(福寧堂) 양씨를 지칭하는 당호(堂號), 혹은 그가 거처하던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영역의 전각을 지칭함.

개설

양춘기(梁春基)는 1912년 덕수궁에 거처하던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궁인은 당시 30여 세로 함녕전 담당 소주방(燒廚房)의 내인(內人)이었다. 고종은 양씨(梁氏)가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낳자, 그가 거처하던 곳을 복녕당이라고 당호를 내려주었다(『순종실록부록』 5년 5월 25일). 이후 궁인 양씨는 복녕당이라고 호칭되었고 덕혜옹주는 순종에게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라고 불렸다. 따라서 복녕당은 덕혜옹주의 생모를 칭하거나, 모녀가 거처하는 전각을 일컬었다.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국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에게 당호를 내리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고종은 복녕당 이외에도 정화당(貞華堂) 이씨(李氏), 삼축당(三祝堂) 김씨(金氏) 등 여러 명의 궁인에게 승은을 내린 뒤 당호를 지어 주었다. 복녕당 양씨는 고종이 서거한 이후 3년 상을 마친 뒤 덕수궁에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옮겨갔다. 그 이후에도 왕실에서는 덕혜옹주의 생모를 복녕당 혹은 귀인양씨(貴人梁氏)이라고 했다.

내용 및 특징

1912년 5월 25일 오후 7시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출산하자마자 고종이 보러갔다(『순종실록부록』5년 5월 26일). 고종은 5월 27일에 함녕전 복녕당에서 이희공(李熹公) 이하 종척(宗戚)들을 불러 양씨로부터 순산(順産) 후의 문안을 받았다(『순종실록부록』 5년 5월 27일). 6월 1일에는 순종이 윤비(尹妃)와 동반하여 고종과 같이 복녕당에 가서 덕혜옹주를 보았다[『순종실록부록』 순종 5년 6월 1일 1번째기사]. 아기의 출산 후 삼칠일인 6월 14일에는 왕족들과 이왕직(李王職)의 장관 등 고등관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7월 13일에는 고종이 덕혜옹주를 자신의 처소인 함녕전으로 데리고 왔다. 고종이 덕혜를 외부인에게 보이거나 대면토록 한 것은 왕실 풍속은 물론 의료적 관점에서도 지나친 것이었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61세로 그만큼 큰 기쁨으로 탄생을 축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변천

복녕당 양씨는 1929년 계동의 친정집에서 유방암으로 죽었다. 덕혜옹주는 당시 일제의 왕공가 규범에 따라 복녕당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복을 입을 수 없었고, 동경에서 일시 귀국하여 상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이후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931년 5월 8일 동경에서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정혜(正惠)라는 딸이 있었는데, 1956년 8월 산 속에서 실종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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