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막(病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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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전염병 환자가 발생할 때에 임시로 세운 병자 수용 시설.

개설

병막(病幕)은 피막(避幕)이라고도 하며 역병 발생지에 설치하여 환자 격리소의 역할을 하였다. 혼동될 수 있는 용어로 피병소(避病所)나 피병가가 있는데 이 시설은 왕실이나 사족들의 휴양, 정양(靜養)을 위한 임시 거처와는 자못 그 사정이 달랐다. 병막의 관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활인서(活人署)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으며 도내(都內)의 무의탁 병자가 수용되고 다수의 전염병 환자가 발생되는 경우에는 따로 병막을 가설, 병자들을 수용하여 죽반탕장(粥飯湯漿)·약이(藥餌)와 의복·천석(薦席) 등을 배급·조호(調護)하게 하고 사망자는 매장하여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사례를 살펴보면, 실제로는 병막의 환자들 중 상민들은 대체로 그 가족들에 의해서, 노비는 그 주인에 의해서 간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은 굶주리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세종실록』 19년 3월 8일).

또한 화재가 나거나 비, 바람과 같은 악천후에 병막이 유실되는 사고와 같이 그 거처의 설비가 대단히 부실하였다고 생각된다(『헌종실록』 1년 6월 20일). 결국 병막은 환자를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정상인을 위한 조치였고, 환자들에 대한 의료적인 조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즐비한 병막에 의한 전염의 사례도 많았던 듯 오히려 다른 구료 대책들에 비해서는 원시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영조대에 진휼청에서 "기민에게 마른 곡식과 죽을 쑤어 주던 일을 이 달 15일 거두는 일로 이미 윤허를 받들었습니다. 마른 곡식을 주던 기민 1천 7백여 구(口)와 죽을 쑤어 주던 기민 3백여 구를 오늘 일제히 밥을 먹인 뒤에 식량을 주어서 돌려보내고, 병막에서 앓고 있는 기민 20여 구는 우선 막에 머물게 하여 식량을 지급하고 연속 구료하여 완쾌되기를 기다려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보았을 때, 병막 관리가 이상적으로 기록된 예도 있다(『영조실록』 18년 5월 15일). 그러나 대규모의 역병자가 출현하는 전염병 유행 시에는 대체로 병자들을 격리하는 장소에 그쳤고 병의 전염을 두려워하여 부실한 관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위치

서울의 경우는 도성 밖 활인서 부근, 사교(四橋) 근처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지방의 경우에는 각 지역의 역병 발생지와 병자가 많은 지역 부근에 병막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병막의 설치는 정상인이 병자에 의해 감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민가와는 떨어진 지역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변천

병막 관련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헌종대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보이는데 병막의 설치와 운영은 고종, 순종대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도 이어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66.
  • 김현영, 『고종시대사』2, 국사편찬위원회, 1968.
  • 홍순원, 『조선보건사』, 북한과학백과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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