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지전(碧蹄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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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선조 26) 1월 27일 벽제관(碧蹄館)에서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개설

평양성 전투 승리 후 도성 탈환을 위해 남쪽으로 진격하던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군이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배한 전투이다. 벽제관(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남쪽에 있는 ‘숫돌고개’라는 뜻의 여석령(礪石嶺)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 전투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명군은 개성까지 진격하는 데 9일이나 걸리는 등 완만한 속도로 남하하였다. 조선 정부가 도성 탈환을 위한 진군을 재촉하자 이여송은 하는 수 없이 1월 18일 평양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후 일본군 사령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는 한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한성 이북 서부지역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모두 한성으로 집결시켰다. 이어 일본군은 한성을 나가 명군과 맞설 것인지, 한성에서 장기 농성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한성에서 퇴각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당시 도성에 남은 일본군의 군량은 2개월 치에 불과하여, 명의 대군이 오기 전에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결국 일본군은 한성을 나가 명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발단

벽제관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은 선봉과 본대로 편성되었다. 본대는 우희다수가가, 선봉은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 지휘했으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대우길통(大友吉統) 등이 후방에 배치되었다. 한편 1593년 1월 25일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군과 조선군의 기병은 개성에 도착하였다.

1월 26일 사대수(査大受)가 이끄는 명군과 경기방어사고언백(高彦白)이 이끄는 조선군은 함께 정탐을 나갔다가 일본군을 만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했다(『선조수정실록』26년 1월 1일).

본격적인 전투는 1월 27일 시작되었다. 오전 6시경 명군과 일본군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명군을 공격해 왔지만 사대수가 거느린 명군이 일본군을 포위하였고,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입화종무(立花宗茂)와 고교직차(高橋直次)가 거느린 일본군이 구원하였고, 명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벽제관까지 퇴각하였다.

오전 11시경 소조천륭경이 거느린 일본군이 여석령 부근에 접근해 왔다. 소조천륭경은 망객현(望客峴) 부근에 군사를 배치한 후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명군의 퇴각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혜음령(惠陰嶺)을 넘어 망객현으로 진출하였다. 이여송은 전면에 위치한 일본군이 약함을 보고 군사를 투입시켰다. 당시 명군의 포병은 후방에 배치되어 선두부대에는 화포가 없었다. 일본군은 복병으로 명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전투지역이 협소하고 땅이 질어 기동력이 떨어져 기병으로 구성된 명군은 곤경에 처했다. 결국 명군은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집중사격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벽제관 전투에서 명의 장수 14명을 비롯해 명군 대부분이 전사했다. 이여송은 지휘사(指揮使)이유승(李有昇)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늦게 도착한 부총병양원(楊元)이 거느린 화군(火軍)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이 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는 것이었다.

경과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군은 파주로 후퇴하였다가 개성으로 물러났다. 전투를 기피하던 이여송은 봄비가 계속 내려 기병의 이동이 어려우며, 군량의 부족, 말의 돌림병[馬疫]으로 인한 전마(戰馬)의 손실 등을 이유로 평양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명은 군사력 사용과 함께 강화를 통해 일본군을 철수시킨다는 화전양면책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이런 점에서 벽제관 전투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평양성 패전 이후 수세에 몰렸던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승리로 조명연합군의 승기를 꺾을 수 있었고, 그 결과 한성 이남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벽제관 전투에서의 승리를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3대 승전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 『징비록(懲毖錄)』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이형석, 『임진전란사』중, 신현실사, 1977.
  • 김동철, 「임진왜란시기 벽제관전투 관련 자료와 전적현창(戰蹟顯彰)에 대한 검토」, 『한국민족문화』27,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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