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온신방(辟瘟新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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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효종 4) 전염병 치료를 위하여 안경창(安景昌) 등이 만든 의학서.

개설

1653년에 황해도 지방에서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효종(孝宗)의 명을 받아 어의인 안경창(安景昌) 등이 전염병 치료를 목적으로 의학서를 만들었다. 이어 국문(國文)으로 된 언해(諺解)를 덧붙여 『벽온신방(廦瘟新方)』이라 이름 짓고, 교서관(校書館)을 통하여 간행한 후 팔도에 널리 반포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1653년 황해도 지방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전염병이 서로(西路)를 통해 경기도와 수도인 한성 및 강원도까지 번지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효종은 약재를 내리며 치료를 하도록 하였으나, 조부양(趙復陽)이 “약물은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없으니, 치료법이나 약명을 널리 알려주는 것이 더 좋다.”는 건의를 하였다. 이에 전염병을 미리 예방하거나 치유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의관을 시켜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상고하여 보완한 후 인포(印布)하도록 결정을 하였고, 효종은 어의인 안경창 등에게 명하여 이 책을 완성한 후에 국문의 언해를 덧붙이게 하였다. 그리고 『벽온신방』이라 이름을 붙여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하게 한 후 팔도의 여러 읍에 널리 반포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11월 17일)

서지 사항

총 1권 1책이며, 목판본이다. 책 크기는 세로 30.6, 가로 20.6cm이고, 지질은 한지이다.

저자 안경창은 자는 자흥(子興)으로, 1627년(인조 5) 23세 때 정묘식년시에서 9명을 뽑은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내의(內醫)가 되었으며, 이후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다.

한편 현재 전하는 책이 초간본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723년(경종 3)에 갑인자(甲寅字)로 다시 재간되기도 하였다. 규장각과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구성/내용

중종 대에 전염병의 유행은 중요한 사회 문제였는데, 이에 대하여 정부 측은 그 대응책의 일환으로 전염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벽온방』 의서를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허준(許浚)이 참여한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은 조선 후기 『벽온방』 중 가장 뛰어난 의학서였지만,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민간에서 사용하기 쉬운 실용적인 의학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벽온신방』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벽온방』에서 약재의 난해한 것은 빼고, 속방의 쓰기 쉬운 것을 첨가하여 언해를 붙여 간행한 것이 특징이다.

책의 머리에는 도승지겸양관대제학(都承旨兼兩館大提學)인 채유후(蔡裕後)의 서문이 있다.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온역병원(瘟疫病原)」에서는 병의 원인과 초기의 치료 방법을 설명했는데, 온역(瘟疫 : 전염병)의 증세가 나타날 때의 치료법으로 땀을 내게 하는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의 효능과 조제 방법·복용법을 설명했다. 특히 도엽(桃葉)·연근총백(蓮根蔥白)·개채자(芥采子)·부평(浮萍) 등 우리 생활주변에 있는 초약(草藥)으로 초기의 증세를 치유하는 방법을 적었다. 「온역반표반리의화해(瘟疫半表半裏宜和解)」에서는 병이 4~5일 경과한 중기의 치유법으로, 화해(和解)를 중시하고 소시호탕(小柴胡湯)의 효능과 조제법·복용법을 설명했다. 「온역리증의하(瘟疫裏證宜下)」는 6~7일 경과한 후의 치유법으로 대시호탕(大柴胡湯)의 약효와 조제방법·복용법을 설명했다. 「온역양법(瘟疫穰法)」과 「온역벽법(瘟疫辟法)」에서는 온역을 물리치고 피하는 방법을, 「부전염법(不傳染法)」에서는 전염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금기(禁忌)」에서는 병자가 금해야 할 사항을 설명했다. 여기에서의 온역은 장티푸스나 발진티푸스로 보이는데, 허준의 『신찬벽온방』보다 간략하고 임상을 거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실용면에서는 뒤떨어진다.

이 책의 국어사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은 17세기에 간행된 것이므로, 표기에도 시대적 경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체언 중에서 ‘ㅅ’종성인 경우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가 오면 예외 없이 연철되는 것 외에 많은 경우에 분철과 중철이 혼용되었다. 합용병서에는 ‘ㅅ계, ㅂ계’만 보이고, ‘ㅄ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종성은 ‘ㄷ 종성’이 사라져 7종성이 되었으며, 자음동화는 ‘ㅅ, ㄷ’이 종성에서 ‘ㄴ’으로 동화되는 예 외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모음 사이의 유기음 표기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받침 다음의 경음화 현상은 표기에 반영했다.

문법면에서 주격조사 ‘가’가 쓰이고, 의도법으로 쓰이던 ‘-오/우-’가 소멸되었고, 접속조사도 ‘와/과’로 음운조건에 따라 변이형태로 나타난다.

어휘는 ‘즉시’와 ‘즉제’가 같이 쓰이며, ‘다ᄉᆞᆸ’이 ‘다섯 홉’을 나타내고, ‘알ᄑᆞ다’와 ‘앓다’와 병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김두종,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 1979.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