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국의주(藩國儀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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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번국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1370년(공민왕 19)에 편찬한 외교 의례에 관한 인쇄 책자.

개설

명(明)은 이전 왕조들과 달리 번국(蕃國) 내에서 번국이 명을 대상으로 거행하는 의례들을 직접 작성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9월에 편찬된 『대명집례(大明集禮)』 빈례(賓禮) 내의 ‘번국접조의주(蕃國接詔儀注)’, ‘번국수인물의주(蕃國受印物儀注)’, ‘번국정단동지성수솔중관망궐행례의주(蕃國正旦冬至聖壽率衆官望闕行禮儀注)’, ‘번국진하표전의주(蕃國進賀表箋儀注)’가 이에 해당하였다. 『번국의주』는 고려의 요청에 응하여 명이 이들 의례만으로 1370년에 편찬한 인쇄 책자였다. 『번국의주』가 고려에 전달된 이후로 조선초기까지 대명 외교 의례는 기본적으로 『번국의주』에 수록된 의례들을 토대로 거행되었다. 『고려사』 예지에 수록된 대명 외교 의례들은 『번국의주』를 저본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또한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의 영조서의(迎詔書儀), 영칙서의(迎勅書儀),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 황태자천추절망궁행례의(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儀), 배표의(拜表儀) 등은 『번국의주』를 활용한 외교 의례의 의주 제정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아쉽게도 『번국의주』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편찬/발간 경위

명은 1369년(공민왕 18)부터 외교 의례인 빈례(賓禮)를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그 성과는 1370년 9월에 편찬된 『대명집례(大明集禮)』 빈례로 귀결되었다. 『대명집례』 빈례는 ‘번왕조공(蕃王朝貢)’, ‘번사조공(蕃使朝貢)’, ‘견사(遣使)’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대명집례』 빈례에는 명이 주체가 되어 ‘번왕(蕃王)’과 ‘번사(蕃使)’를 맞이하는 의례 외에도 번국 내에서 번국이 주체가 되어 명을 대상으로 거행하는 의례가 수록되었다. ‘번국접조의주’, ‘번국수인물의’, ‘번국정단동지성수솔중관망궐행례의주’, ‘번국진하표전의주’가 그것들이다. 번국 내에서 거행되는 의례를 중국 측이 직접 작성한 것은 명대 이전에는 보이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번국의주(蕃國儀注)』의 편찬은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배경으로 하였다. ‘번국 내’ 공간에서 거행되는 의례들로 구성된 『번국의주』는 『대명집례』와 같은 해인 1370년에 편찬되었다. 인쇄 책자로 편찬 주체는 명이었다. 그런데 『번국의주』는 명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번국’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1369년 8월 고려 측이 명에 『본국조하의주(本國朝賀儀注)』의 하사를 요청하자 다음해 6월 명 태조가 이를 내려 준 것과 같이, 『번국의주』 또한 고려의 요청에 응하여 명이 편찬한 것이었다. 이러해서인지 명은 『번국의주』를 지니고 있지 않았고, 편찬 후 일정 기간이 경과한 세종대에 명 사신이 이 책의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는 일화도 있었다. 현재 중국 측 기록에서 『번국의주』에 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데 비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이 『번국의주』를 소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조선이 지니고 있던 『번국의주』는 명이 고려에게 준 것으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번국의주』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단종실록』 즉위년 8월 22일).

서지 사항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번국의주』는 인본(印本)의 책자였다고 한다.

구성/내용

현재 『번국의주』의 실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번국의주』에 어떤 의례들이 수록되었는지를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기록은 없다. 그렇기는 하나 『번국의주』에 수록된 의례들은 명이 번국을 대상으로 작성한 의례들 중 ‘번국 내’ 공간에서 거행되는 것으로, 『대명집례』로 치자면, ‘번국접조의주(蕃國接詔儀注)’, ‘번국수인물의주(蕃國受印物儀注)’, ‘번국정단동지성수솔중관망궐행례의주(蕃國正旦冬至聖壽率衆官望闕行禮儀注)’, ‘번국진하표전의주(蕃國進賀表箋儀注)’가 이에 해당하였다.

그동안 『고려사』 예지의 ‘영대명조사의(迎大明詔使儀)’, ‘영대명사로사의(迎大明賜勞使儀)’, ‘원정동지상국성수절망궐하의(元正冬至上國聖壽節望闕賀儀)’, ‘진대명표전의(進大明表箋儀)’는 앞서 소개한 『대명집례』 의례들과 거의 동일하여 그것들을 저본으로 하여 작성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대명집례』는 조선초기까지도 입수되지 못하고 있어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고려사』 예지의 이들 의례의 저본은 『대명집례』가 아니라 『번국의주』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번국의주』는 『대명집례』로 치자면, ‘번국접조의주’, ‘번국수인물의주’, ‘번국정단동지성수솔중관망궐행례의주’, ‘번국진하표전의주’로 구성되었다. 즉, 번국이 조서를 맞이하는 의례와 번국이 황제가 보낸 인(印)과 물(物)을 받는 의례와 번국이 정단·동지·성수절에 행하는 망궐 의례 그리고 번국이 표전을 보내는 의례가 『번국의주』에 수록되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번국의주』에 관한 기사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번국의주』에 관한 기록들은 『번국의주』를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다른 일과 연루되어 우발적으로 등장한 까닭에, 『조선왕조실록』 기사들을 통하여 『번국의주』에 수록된 의례들을 온전히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번국접조의주’, ‘번국수인물의주’, ‘번국정단동지성수솔중관망궐행례의주’에 해당하는 의례들이 『번국의주』에 수록된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대명 외교 의례는 기본적으로 『번국의주』에 수록된 의례들을 토대로 거행되었다. 고려말기에는 『번국의주』를 바탕으로 하여 대명 외교 의례인 ‘영대명조사의’, ‘영대명사로사의’, ‘원정동지상국성수절망궐하의’, ‘진대명표전의’가 작성되었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대명 외교 의례가 『번국의주』에 수록된 의례들을 토대로 행해졌고, 『번국의주』를 활용한 외교 의례의 의주 제정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된 영조서의, 영칙서의,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 황태자천추절망궁행례의, 배표의(拜表儀) 등은 이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해당 작업은 이후 『국조오례의』로 수용되었다.

조선은 『번국의주』를 토대로 하여 조서를 맞이하는 의례를 거행하였음에도 세종대 이후로 간간이 명 사신과 영조 의례 내의 일부 예식을 놓고 갈등하곤 하였다. 특히 왕이 국문(國門), 즉 도성문(都城門) 밖에서 조서를 맞이할 시에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를 요구한 명 사신과 ‘국궁(鞠躬)’을 고수한 조선 측 간에 여러 차례 갈등이 반복되었다. 당시 조선이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를 거부하는 논거는 다름 아닌 『번국의주』였다.

참고문헌

  •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 『고려사(高麗史)』
  • 『대명집례(大明集禮)』
  • 김문식, 「조선시대 國家典禮書의 편찬 양상」, 『장서각』 21, 2009.
  • 최종석, 「조선초기 ‘時王之制’의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52, 2010.
  • 한형주, 「對明儀禮를 통해 본 15세기 朝-明관계」, 『역사민속학』 28,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