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탁안(柏卓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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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총세무사 겸 탁지부 고문을 지낸 영국인.

개설

백탁안은 존 맥닐리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한자식 표기이다. 브라운은 1835년 11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하였고, 벨파스트 퀸스 대학교(Queen’s University Belfast)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Trinity College Dublin)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889년에는 더블린 대학교(Dublin University)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861년부터 1872년까지 주청영국공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1873년 4월에 무역 관련 변호사로 중국해관에 들어갔으며, 1874년에 광동(廣東)의 세무사로 임명되었다.

1893년 8월에 중국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赫德], Robert Hart)의 추천으로 조선 총세무사로 임명되었다. 1893년 10월에 조선 총세무사로 부임하였으며, 1894년 이후에는 탁지부 고문을 겸직하였다. 1905년에 한국 총세무사직을 사임하고 물러났으며, 1913년에 런던 주재 중국영사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에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브라운은 1893년 10월에 모건(F. A. Morgan)의 후임으로 조선 총세무사로 부임하였다. 브라운은 메릴(H. F. Merrill), 모건과 마찬가지로 중국 총세무사 하트가 선임한 인물이었다. 하트는 브라운을 조선 총세무사로 낙점한 후, 이홍장에게 인준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이홍장은 원세개에게 브라운의 선임을 알렸으며, 원세개가 외아문 독판 남정철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즉, 조선 총세무사의 임명 과정에는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이 관철되었으며, 사실상 중국해관에서 조선해관을 통제하였던 것이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조선해관이 청국해관의 통제를 받는 상황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대조규개(大鳥圭介,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1894년 9월 중순부터 현재의 조선해관을 철폐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해관 설립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브라운은 조선 정부로부터 이미 8월 중순에 총세무사를 계속 맡을 것과 더불어 탁지부 고문을 맡아 줄 것을 요청받은 상태였다. 조선은 일본 측 해관 개혁안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이 해관 및 재정을 장악하는 상황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브라운은 김윤식으로부터 조선해관에 관한 모든 관리를 조선 정부에서 관장한다는 점을 통보받았다. 아울러 김윤식은 총세무사에게 세관 운영에 관련한 전권을 부여하되, 총세무사 임명과 관련해서는 외무아문과 탁지아문이 공동으로 관장하겠다는 뜻을 브라운에게 전달하였다. 브라운은 김윤식으로부터 조선해관과 청국해관의 단절을 통보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청국해관과의 관계 단절을 통해서 조선해관을 관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관원의 급여 지급을 비롯한 조선해관 운영비 조달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브라운은 종전처럼 청국 정부로부터 해관 경비를 조달받는 안을 구상하였다. 아울러 그는 청국 세관의 총세무사 하트가 계속해서 보조금을 보내주는 이상 더 이상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김윤식에게 제시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브라운의 건의를 수용하여 제도상으로는 조선해관을 청국해관으로부터 독립시키되, 비공식적으로 청국해관의 보조금을 받아서 조선해관을 운영하는 절충안을 수용하였다.

조선과 청해관 사이의 비공식적인 관계는 1897년 12월에 부임한 러시아인 탁지부 고문 알렉세이에프([戞櫟燮], K. Alexeieff)에 의해서 끝나게 되었다. 브라운은 알렉세이에프가 자신을 총세무사에서 해고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브라운은 알렉세이에프와 협상을 통해서 청국해관으로부터 받아 온 보조금을 철폐하고, 탁지부가 조선해관을 관리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1898년 3월에 고종은 알렉세이에프를 파면하고 브라운을 탁지부 고문으로 다시 앉혔다(『고종실록』 35년 3월 24일). 아울러 브라운은 고종으로부터 관세 보고를 탁지부에 하지 말고 고종에게 직접 보고하라는 훈령을 받았으며, 철도 사무를 감독할 것을 명령받기도 하였다(『고종실록』 35년 8월 19일). 고종의 신임을 받자, 브라운은 이를 이용하여 해관을 탁지부에서 독립된 기구로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고종이 관세 수입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면서 왕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해관을 독자적으로 운영함에 따라, 브라운은 고종을 비롯한 한국 관리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1899년 9월에 탁지부에서 관세 수입을 국고에 납부할 것을 요청하자, 브라운은 차관 상환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결국 1901년 3월에 이용익을 비롯한 고종의 비호를 받은 친러 세력들이 운남차관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브라운을 해고시키려고 하였으나, 영국 함대의 무력시위와 일본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브라운은 탁지부 고문으로 있으면서 재정의 긴축정책을 추진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차관을 차단하기 위해서 긴축재정을 통하여 확보한 잉여 금액을 일본 차관을 상환하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금융과 화폐가 조선에 진출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1905년 초 영국은 한국 정부와 브라운의 고용계약의 갱신을 확정하였다. 아울러 65세에 이르는 브라운의 나이를 고려해서 그의 후계자로 바우라를 내정하였다. 브라운의 후임 바우라는 1905년 5월에 서울에 부임하였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한국의 보호국화를 명목으로 한국해관을 일본해관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측은 영국에게 브라운의 사임과 일본인 총세무사 임명을 요구하였으며, 영국은 일본 측 요구를 수용하였다. 결국 브라운은 일본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고 1905년 8월에 총세무사직을 사임하였다.

상훈 및 추모

1905년, 훈1등 서훈 및 태극장(太極章) 하사.

참고문헌

  • 김현숙, 「한말 고문관 맥닐리 브라운(McLeavy Brown)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 66, 1989.
  • FO: Records created and inherited by the Foreign Office in UK.
  • -FO 17: Political and Other Departments: General Correspondence before 1906, China.
  • -FO 228: Consulates and Legation, China: General Correspondence, Series I.
  • -FO 405: China and Taiwan Confidential Print.
  • P. D. Coates, The China Consuls, British Consular Officers, 1843~1943,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