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호소(防護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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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과 국방상 목적을 위해 각 지역의 요충지에 설치한 군대의 경계 감시소.

개설

한양이나 각 도의 국방상 요충지에 설치한 감시소이다. 1425년(세종 7)에는 한양에 13개를 설치했고, 1428년에는 함경도에 설치하고, 1439년(세종 21)에는 제주에 설치했다. 1454년(단종 2)에는 긴요치 않은 봉화(烽火)를 혁파하고, 그것을 담당하던 군인들을 방호소에 옮겨 붙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방호소는 위험에 대비한 경계와 방비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또한 평안도나 함경도 인민이 강 건너 도망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설치하기도 했다. 한양은 특히 도둑과 화재를 염려해 설치했다. 제주는 적선(賊船)이 침범해 들어오는 곳에 방호소를 설치했다. 방호소에는 갑사(甲士)를 두었다.

조직 및 역할

1428년(세종 10)에는 평안도 도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방호소를 설치하였고, 1431년(세종 13)에는 왕이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수렵을 나갈 때 도성이 빈 사이 도둑이 들거나 화재가 날 것을 우려해 서울의 각 지역에 방호소를 설치하고, 화재 등을 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이 그에 대한 순찰과 적발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경기,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하삼도에는 농사의 때를 놓친 백성들이 고을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이를 금지하기 위해 방호소를 설치하였다. 만일 고을에서 이탈하는 자를 적발하면 즉시 죄를 따져 본거지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1439년(세종 21)에는 제주에 왜구가 배를 댈 수 있는 요해지에 방호소를 설치했다. 수산과 죽도(竹島)의 인근에 있는 서귀(西歸) 방호소에는 모두 성곽이 없어 수축하도록 했다. 제주 방호소에는 그 근처에 사는 직임이 있고 일을 알 만한 자로서 토관(土官)과 상천호(上千戶)·부천호(副千戶)·백호(百戶)를 임명하고, 그 밖의 여정(餘丁)들은 정군(正軍)을 만들어서 각각 봉족(奉足)을 지급하되, 많고 적은 차등을 두어서 토관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 교대로 방어하게 했다. 또 토관과 정군·봉족을 적(籍)을 만들어 잡색군(雜色軍)이라 칭하고, 상시로 점열(點閱)을 행하게 했다. 제주 목관(牧官) 동쪽에는 7~8포(浦), 서쪽 17포, 정의(旌義)·대정(大靜) 13포 등 60여 대소의 포가 모두 방호소에 속해 있었다.

변천

1425년(세종 7)에는 경성 안 13개소에 방호소를 설치했다. 동면(東面)에는 유우소(乳牛所) 북점(北岾)에 1개소, 금륜사(金輪寺) 동북점(東北岾)에 1개소이며, 북면(北面)에는 흥덕사(興德寺) 동원(洞源)에 2개소, 광효전(廣孝殿) 북점(北岾)에 1개소, 가회방(嘉會坊) 동점(洞岾)에 1개소, 경복궁 북점(北岾)에 2개소, 서면(西面)에는 본궁(本宮) 남북에 2개소, 남면(南面)에는 남부학당(南部學堂) 동원점(洞源岾)에 1개소, 수구문(水口門) 동원(洞源)에 1개소, 개천유방축(開川柳坊築)에 1개소다(『세종실록』 7년 1월 15일).

1428년에는 함길도 건너편 남라이(南羅耳)의 동쪽 고개에 방호소를 더 설치하여 망을 보고 방어하는 것을 편리하게 했다(『세종실록』 10년 5월 19일).

1441년(세종 23)에 방호소에 소속되었던 제주 각포(各浦)의 공사(公私) 선척(船隻)을 모두 다 찾아내 삼군(三軍)으로 나누고 각기 관내[掌內]에 정박시켰다가 만일 왜적이 있으면 좌우에서 협공하도록 했다(『세종실록』 23년 7월 18일).

1454년(단종 2)에는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의 망운산(望雲山)·성현(城峴) 두 봉화는 모두 긴요치 않으므로 그를 혁파하고, 그 군인들을 성현 방호소(城峴防護所)에 옮겨 붙였다(『단종실록』 2년 1월 12일).

1510년(중종 5)에는 강원도 평해(平海) 등 연해변 각 고을에 방호소를 설치하여 군사를 두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강원도는 도서가 없고 바다에는 파도가 심하여 배를 운행하기 어려우니, 쉽게 소란을 일으킬 지역이 아니라 하여 별방호처(別防護處)에 따로 수군(戍軍)을 두지는 말도록 했다(『중종실록』 5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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