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령(朴以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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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전기 세종~단종 때 활동한 무신. 황해도 병마도절제사(黃海道兵馬都節制使)를 지냈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아버지는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박안신(朴安臣)이며, 어머니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정세현(鄭世賢)의 딸이다. 조부는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박문로(朴文老)이고, 조모 박씨(朴氏)는 박사덕(朴思德)의 딸이다. 아들은 박사흥(朴士興)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33년(세종 15) 부사직(副司直)으로 도원수(都元帥)최윤덕(崔閏德)의 막하에서 건주 야인(建州野人)을 정벌하였다. 1440년(세종 22)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가 되었고, 1442년(세종 24)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가 되었다. 그 해 3월 14일 행재소(行在所)에 와서 배알하니, 임금이 사복마(司僕馬)를 타고서 호가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함길도에 가서 수자 리산 지가 6년이 되었는데, 아버지인 호조 판서박안신이 나이가 많았으므로 와서 뵙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날인 3월 15일에는 임금이 그를 인견(引見)하여 방어(防禦)에 대한 일을 묻고, 이내 술과 풍악을 내려 그 아버지를 축수(祝壽)하였다. 1443년(세종 25) 7월 초에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가 되고, 그 해 7월 중순에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가 되었다. 1444년(세종 26) 1월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가 되고, 9월 전라도 처치사(全羅道處置使)가 되었다. 1445년(세종 27) 7월 다시 중추원 첨지사가 되었다. 1446년(세종 28) 7월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 11월 9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다. 1449년(세종 31) 8월 상중이었으나 기복(起復)되어 영변도호부 판사(寧邊都護府判事)가 되었다.

1450년(세종 32) 윤1월 황해도 병마도절제사(黃海道兵馬都節制使)가 되었다가 공조 참판이 되었다. 그해 세종이 붕어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5월에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그 해 9월에 돌아왔다. 1451년(문종 1) 4월 평안도 좌도절제사(平安道左都節制使)가 되었다.

1452년(문종 2) 4월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가 가자되었다. 그해 문종이 붕어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9월에는 오래도록 외방(外方)에서 수고하였기 때문에 옷 2령(領)을 하사받았다. 1453년(단종 1) 7월 중추원(中樞院) 사(使)가 되었는데, 10월 11일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한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김종서에게 붙었다 하여 조석강(趙石崗)·함우치(咸禹治)·이승손(李承孫)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해 11월 11일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연일(延日)로 이배되어 그 곳에서 11월 28일(경진) 교살되었으며 가산(家産)을 몰수당하였다.

제향

1791년(정조 15) 2월 장릉(莊陵) 정단(正壇)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상주 박씨 세보(尙州朴氏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