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웅(朴敏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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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4년(현종 15)~1732년(영조 8) = 59세]. 조선 후기 영조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창성부사(昌城府使)이고, 증직(贈職)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이다. 자는 사호(士豪)이고,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인데, 증조부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박정명(朴定命)이고, 조부는 부사(府使)박원진(朴元震)이다. 아버지는 박세은(朴世隱)이고, 동생은 박민준(朴敏俊)이다.

영조 시대 활동

도량과 재간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소년 때부터 이름이 났다. 뒤에 장신(將臣) 장붕익(張鵬翼)과 이봉상(李鳳祥)이 각각 국사(國士)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면서 충청병사(忠淸兵使)이봉상과 영장(營將)남연년(南延年)을 죽였다. 박민웅은 이때 서울에 있다가 반란 소식을 듣고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 군사 수백 명을 모집하여 반적(叛賊)의 토벌에 나섰는데, 대신들의 추천으로 충청병마우후 겸 창의사(忠淸兵馬虞侯兼倡義使)로 임명되었다. 그는 반란군 신천영(申天永) 등 20여 명의 목을 베어 조정에 올려 보냈다.

이인좌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모반계획을 세웠던 정희량(鄭希亮)이 경상도의 안음(安陰: 安義)·거창(居昌)·합천(陜川)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상주영장 겸 영남창의사(尙州營將兼嶺南倡義使)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빈란 진압 직후에 인수(印綬)를 풀고 돌아왔다가 조정의 명령도 없이 임지를 무단이탈하였다는 죄목으로 고향에 잠시 유배되었다. 그 뒤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732년(영조 8)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임명되어 창성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이다.

추증

1788년(정조 12) 병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풍서집(豊墅集)』
  • 『상당창의록(上黨倡義錄)』
  • 청주시지편찬위원회, 『청주지(淸州誌)』, 청주시지편찬위원회, 1961.
  • 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청주시, 『청주시지(淸州市誌)』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청주시,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