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음(米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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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나 좁쌀 등의 곡물에 물을 충분히 붓고 푹 끓인 후 체에 걸러 낸 음식.

개설

멥쌀이나 찹쌀, 좁쌀, 기장쌀 등의 곡물을 씻어 불린 후 10배 이상의 물을 부어 곡물의 껍질만 남을 정도로 푹 끓인 다음 체에 걸러 내린 걸쭉해진 물을 말한다. 숟가락으로 떠먹거나 마신다. 조선에서는 궁중의 일상식에서 초조반(初朝飯)이나 약용으로 이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미음(米飮)은 멥쌀을 깨끗하게 씻어서 솥에 넣은 후에 물을 많이 붓고 오랫동안 끓여서 쌀알이 푹 무르게 쑤어 체에 걸러 낸 걸쭉한 음료를 말한다. 먹을 때 소금이나 진장을 쳐서 먹는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대체로 쌀이 다섯 숟가락이면 물은 다섯 찻잔을 부어 두 찻잔이 되도록 한다고 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른 아침에 먹는 일상식 차림으로 미음을 올렸다. 미음은 멥쌀이나 황량미(黃粱米)·청량미(靑梁米) 같은 좁쌀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찹쌀이나 보리·기장 등도 이용하였다. 또 부재료로 인삼이나 대추, 소고기, 홍합 등을 넣기도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미음상에는 백미음(白米飮), 황량미음(黃梁米飮), 청량미음(靑梁米飮), 추모미음(秋麰米飮), 삼합미음(蔘蛤米飮), 대추미음[大棗米飮], 백감미음(白甘米飮) 등이 올랐다.

미음은 병인식, 구황식, 약을 복용하기 위한 용제로 이용되었다. 왕이나 왕족이 병이 났을 때 어의(御醫)는 밥 대신 환자식으로 미음을 먹게 하였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구휼(救恤)을 위한 목적으로도 미음을 내렸다(『숙종실록』 45년 1월 4일). 또 가루나 환으로 된 약재를 미음에 넣어 마시도록 했다(『선조실록』 32년 4월 17일). 영조는 음력 7월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상(喪)을 당해 대여(大轝)의 삼도(三度) 습의(習儀)를 거행하며, “날씨가 이와 같이 더운데, 군병(軍兵)이나 여사군(轝士軍)에게 미음을 먹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신여군(神轝軍)과 대가호군(大駕扈軍)에게 미음을 내리고 모두 서늘한 그늘에 머물면서 기다리게 하였다(『영조실록』 33년 7월 7일). 혹여 군사들이 더위를 먹어 지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는 왕과 왕족이 병환으로 먹은 미음류에 미음(米飮), 속미음(粟米飮),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 청량미음, 청미음(淸米飮), 인삼직미음(人蔘稷米飮), 홍합미음(紅蛤米飮), 삼합미음, 목미음(木米飮)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인삼속미음이 53회, 속미음이 35회로 가장 많다. 정조는 담체(痰滯) 시에는 청량미음을 먹었는데, 이때의 의관(醫官) 오도형(吳道炯)은 변비 증세로 아랫배가 더부룩하여 대변을 보기가 매우 어려울 때에 “욱리인(郁李仁)을 미음에 타고, 거기에다 생강즙[干汁]을 타서 들도록 하였다.” 또한 『산림경제(山林經濟)』의 구급방(救急方)에는 나미음(糯米飮)이 두창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산림경제(山林經濟)』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 『향산집(響山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