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일기(眉巖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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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며, 문신인 유희춘(柳希春)이 그의 나이 55세 되던 1567년 10월 1일부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577년 5월 13일까지 약 11년에 걸쳐 쓴 일기.

개설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유희춘일기(柳希春日記)’라고도 불리며,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柳希春)이 쓴 일기다. 유희춘은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 책은 원래는 14책이었으나, 11책만이 남아 있다. 그 일기의 일부는 필자의 문집인 『미암집』에 초록, 기재되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 그가 죽기 전일까지의 약 10년 동안의 친필로 쓴 일기인데, 약자와 속자가 간혹 사용되었고, 오탈(誤脫)과 연문(衍文)이 간혹 개재해 있으며, 중간에 파손, 마멸된 자구와 약간 빠진 것도 있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관직생활을 할 때의 기록이므로 경연관으로서의 강론 내용을 비롯, 관직 수행과 관련된 조정의 동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일기는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함께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사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936~1938년에는 5책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8로 두주(頭注)ㆍ방주(旁注)를 곁들여 간행되기도 하였다.

서지 사항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26.3cm 가로 18.5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명종 말 선조 초의 여러 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문관ㆍ전라도감사ㆍ사헌부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ㆍ사회ㆍ경제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각 책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제1책은 1567년 10월 1일에서 1568년 3월 29일까지, 제2책은 1568년 3월 29일에서 12월 5일까지, 제3책은 1569년 5월 22일에서 12월 30일까지, 제4책은 1570년 4월 24일에서 7월 8일, 제5책은 7월 9일에서 12월 25일, 제6책은 12월 26일에서 1571년 12월 3일, 제7책은 1572년 9월 1일에서 1573년 5월 26일, 제8책은 1573년 6월 1일에서 12월 30일, 제9책은 1574년 정월 1일에서 같은 해 9월 26일, 제10책은 1575년 10월 27일에서 1576년 7월 29일, 제11책은 부록으로서 저자와 그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미암일기』를 읽는 즐거움은, 딱딱한 조정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아내 송씨와 주고받은 편지 구절에 스며있는 애틋함, 부부의 건강을 염려하여 질병의 기미가 보일 때마다 그 증세를 일일이 기록해 놓는 섬세함, 가족들이 꾼 꿈을 매일같이 기록하고 길몽인지 흉몽인지 점쳐 보는 소심함, 첩(妾)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들을 좋은 데에 혼인시키려고 노력하는 부성애(父性愛) 등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심지어는 주변 인물들이 무언가 부탁하기 위해 가져오는 생선과 젓갈의 종류를 나열하는가 하면, 집에서 부리는 게으른 노비를 체벌한 내용까지 기록해 놓았다. 관직생활과 학문에 대한 기록이자 아내와의 애정일지이기도 하고, 집안의 경제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가계부이기도 하며, 꿈의 내용과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은 꿈 해설서이기도 하다.

『미암일기』가 씌어진 16세기는 한국 가족사에 있어서 매우 주목되는 시기다. 이 무렵에는 조선시대의 전형, 나아가서는 한국 가부장제 가족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는 유교적 틀 속에 갇힌 가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16세기의 양반들은 혼인하면, 처가에서 거주하고, 그 결과 자식은 외가(外家)에서 성장했다. 혼인 후에 친정에서 자식을 키우며 살던 딸들이 친정 제사를 지내고, 외손자가 제사를 물려받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유교적 통념과는 다른 이런 가족의 생활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미암일기』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자료이다. 『미암일기』에서는 유희춘과 아내 송씨의 부부관계는 동지적 관계이며, 동반자적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오랜 유배생활을 경험한 관료였지만, 그보다는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것도 그렇고, 그가 역임한 관직은 대부분 학자의 명망에 걸맞은 것이었다. 경연관을 지낸 사실은 그가 경전에 달통했음을 입증해준다. 그는 외조부 최부(崔溥)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16세기의 호남지방 유학자로서는 가장 명망 있는 학자 대열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유희춘의 아내는 홍주송씨(洪州宋氏)로 흔히 송덕봉(宋德峯)으로 불렸는데, 덕봉은 그의 호(號)이다. 양반가문의 여성은 이름이 알려진 경우가 거의 없고, 성씨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호나 당호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송덕봉ㆍ신사임당ㆍ허난설헌ㆍ임윤지당 등 유명 여성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혼인 후 아들ㆍ딸 남매를 낳고, 남편을 내조하며 살았던 송씨는 『덕봉집(德峯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을 남길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따라서 송씨의 역할은 아내로서의 내조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시문을 서로 교환하거나 학문적 조언을 해 주는 학문적 동지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고차원적인 관계가 오랜 별거 생활 속에서도 서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애틋한 부부관계를 지속시켜준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생활에 아직 성리학적 풍조가 침투하기 이전인 16세기에는 송덕봉과 같은 여성이 남편과 더불어, 자신의 문학적ㆍ학문적 견해를 주고받으면서 애정을 교환할 수 있었다. 아내 송덕봉의 학문적 격조야 말로 유희춘 부부가 학문적 동반자이며, 영원한 친구로서 부부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이었음을 이 글들로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개인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며,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함께 『선조실록』의 기사사료가 되었다. 특히 동서분당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임체(任遞)와 순력(巡歷) 및 감사의 직무 수행,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관과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 김선명, 「미암일기(眉巖日記)를 활용한 생활사 학습방안」, 『역사와 역사교육』 제28호, 웅진사학회, 2014.
  • 송재용, 「『미암일기』에 나타난 서적 및 출판 관련 사항 일고찰」, 『동아시아고대학』 제36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 이연순, 「『미암일기』를 통해 본 16세기 중반의 날씨 기록과 표현」, 『한국고전연구』 통권21집, 한국고전연구학회, 2010.
  • 이연순, 「『미암일기』에 나타난 인물평가 방식」, 『동양고전연구』 제38집, 동양고전학회, 2010.
  • 홍세영, 「『미암일기』의 의학 기록 연구」, 『민족문화』 제36집, 한국고전번역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