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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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미륵산에 있었던 절.

개설

미륵사(彌勒寺)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제 무왕의 왕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왔으나, 2009년에 서탑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의하면 639년 백제 귀족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의 발원으로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후삼국시대에는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후백제(後百濟)의 중요한 사찰이었고, 고려 태조 때 미륵사탑을 개탑하였다. 조선 태종 때 중신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18세기 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미륵사지(彌勒寺址)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고, 최근의 발굴에서 19,000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武王條)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연못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이에 왕비가 무왕에게 미륵삼존을 위해 절을 세워줄 것을 청하자, 그곳에 연못을 메우고 미륵삼존상과 전각, 탑, 낭무(廊廡) 등을 건립하고 미륵사(彌勒寺)라고 했다는 것이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석탑 안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인 639년(己亥年) 백제의 귀족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건립을 발원하였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미륵사는 창건 설화와 달리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이 발원하여 건립된 사찰로 밝혀졌다. 미륵사 창건의 배경이 된 백제 무왕인 서동(薯童)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만 남게 되었다. 한편으로 미륵사의 중원과 동원·서원을 무왕과 왕비가 나누어 건립했다는 추정도 제기되고 있다.

통일신라 때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남문과 당간지주, 남쪽의 연못 등이 조성되었고, 후삼국 시대에는 선불장(選佛場)을 개최하는 등 금산사와 더불어 후백제의 중요한 사찰이었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인 922년(태조 5)에 혜거(慧炬) 국사(國師)가 미륵사탑을 개탑하였다. 미륵사지에서 중국 송나라 도자기와 고려청자, 차 도구인 다연 등이 발견되고 있어서 이 시기 미륵사에는 차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익주(益州, 현 익산) 미륵사가 중신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 종파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익주 미륵사는 중신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한 사찰이었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미륵사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에도 여전히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의 절터에서 ‘만력(萬曆) 15년’(1587년, 선조 20)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 전까지도 존속한 사찰이었으나, 이후 전란을 겪으면서 18세기 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인 강후진의 『와유록(臥遊錄)』에 "미륵사탑은 100여 년 전 벼락을 맞아 반이 허물어졌다. 7층으로 남아 있는 석탑의 옥개석 위에 사람이 올라가 낮잠을 즐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4) 근현대

폐사된 미륵사의 절터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 보수와 함께 실측이 이루어졌고, 1966년 6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1974년 동탑지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 결과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 편에 금당을 1개씩 둔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임을 알게 되었다. 1992년 미륵사지 동탑 복원이 진행되었고, 일제 때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발라놓았던 미륵사지 서탑에 대한 해체 복원이 2001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서탑의 해체가 마무리될 무렵인 2009년 1월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미륵사 절터에서는 현재까지 막새기와, 토기, 불상 등 19,000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다. 특히 사리봉안기의 발견으로 미륵사의 창건 배경과 창건자, 건립 연대 등이 규명되었다.

문화재

미륵사지탑(彌勒寺址塔, 국보 제11호)은 백제 무왕 때 건립된 서쪽 석탑으로 일제 때인 1915년 콘크리트로 보수되었고, 2001년에 해체되었다. 석탑은 해체되기 전 6층(14.42m)까지 남아 있었는데 원래 7층 또는 9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조탑 양식의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맨 아래에 1층 탑신이 세워지고 4면에는 각기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탑 속에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석탑은 2016년까지 해체 이전의 모습인 6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 보물 제236호)는 미륵사탑 앞쪽에 있는 2기의 당간지주로 높이 3.95m이며,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는 최근 미륵사지석탑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한 뒤 붉은색 칠[朱漆]을 해 글씨가 선명히 드러나도록 하였다. 좌평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인 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는 금제사리봉안기와 함께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 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사리공에서는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6개, 장식용 칼로 보이는 단도 2점, 은제관식(銀製冠飾), 시주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 얇은 금편, 각종 구슬 등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와유록(臥遊錄)』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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