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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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에 서부학당의 기능을 잠시 담당한 경기도 개성의 절.

개설

미륵사(彌勒寺)는 고려초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초 대규모로 궁궐을 조성하고 사찰이 왕성하게 창건되던 시기에 이 절도 창건되었다.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렸지만, 이후 다시 중창하였다. 미륵사는 고려초부터 법상종(法相宗)에 속해 있었으며,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僧科)가 시행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 후 교육 기관이 온전히 마련되기 전인 태종대에는 서부학당(西部學堂)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미륵사는 936년(고려 태조 19) 광흥사(廣興寺)·현성사(現聖寺)·내천왕사(內天王寺) 등과 함께 고려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었다. 창건 이후 미륵사는 고려 왕들의 관심을 받았고, 이따금 왕들이 직접 행차를 하기도 했다. 1107년(고려 예종 2) 예종은 여진 정벌을 시작하면서 미륵사에서 재(齋)를 열어 승리를 기원하였고, 1183년(고려 명종 13) 명종은 인종비 공예태후를 순릉(純陵)에다 장사지낸 뒤 의창궁(義昌宮)에서 이 절까지 걸어가 승복을 입고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1262년(고려 원종 4)에는 몽고의 전란으로 불타버렸던 미륵사와 공신당(功臣堂)을 중창하였다.

미륵사는 996년(고려 성종 15)에는 승과를 시행하기도 하였는데, 고려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미륵사의 위치가 점차 격상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미륵사는 미륵불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법상종 계통의 사찰이었다.

변천

조선 건국 후 미륵사는 잠시 서부학당의 생도가 공부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하였다(『정종실록』 2년 8월 21일). 이때 동부학당의 학생은 순천사(順天寺)에 모이도록 했으나, 두 절의 승려들이 삼보를 파괴하고 더럽힌다고 아룀에 따라 곧 학당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고려후기 원종대에 고려 정부는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동서학당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유학 진흥책의 일환으로 설립한 학교였으나 몽고항쟁 등의 여파로 크게 발전을 이루지는 못한 채 유지되다가 공양왕대에 이르러 개경의 각 부인 동·서·남·북·중 5부로 확대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초기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이후 세종대에 사부학당으로 정비되었다. 미륵사는 오부학당 체제 당시 각 학당들이 아직 독립적인 학사가 없을 때 서부학당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사찰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조선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