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성(文昌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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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文筆)과 문운(文運)을 창성하게 한다는, 북두칠성 위쪽에 자리한 여섯 개의 별.

개설

문창성은 문창 6성을 가리키는데, 북두칠성의 두괴(斗魁) 전면에 반달 모양으로 자리한 별자리이다. 북두칠성이 1년 내내 관측되는 것처럼 문창성 또한 사시사철 북쪽 밤하늘에서 빛난다. 그런 까닭에 문창성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는데, 하늘의 법도를 계획하고 집행하는 여섯 관부라는 뜻에서 ‘육부(六府)’라고 불렸다. 제1상장성(上將星)은 군진을 지휘하는 대장군의 별로, 병권의 위무(威武)를 세우는 일을 맡고, 제2차장성(次將星)은 천제의 근신인 상서(尙書)의 별로, 왕의 좌우를 바로잡는 일을 담당한다. 제3귀상성(貴相星)은 나라의 제사와 시호를 담당하는 태상(太常)의 별로서 문서를 기록하는 일을 맡고, 제4사록성(司祿星)은 치안과 순찰을 담당하는 사예(司隸)의 별이자 궁중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는 사중(司中)의 별이며, 대신들의 상훈과 공적을 품신하고 진언하는 일을 주관한다. 제5사명성(司命星)은 성변(星變)과 금수·초목의 요변(妖變)을 맡은 사괴(司怪)의 별이자 궁중의 전적 관리와 천문 역법을 관장하는 태사(太史)의 별이며, 재앙을 소제(掃除)하는 일을 한다. 제6사구성(司寇星)은 범법자의 추포 및 규탄·재판·형벌 등을 맡은 대리(大理)의 별이며, 궁중의 보물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내용 및 특징

문창성은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에서부터 이미 중요한 별자리로 주목을 받았고, 6개의 별이 각기 서로 다른 직분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따르면, 위서(緯書)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에서는 6개의 별 각각의 의미를 세밀히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상장은 위무(威武)를 건립하고, 차장은 좌우를 엄정케 하고, 귀상은 문서(文緒)를 다스리고, 사록은 상공(賞功)과 진사(進士)를 담당하고, 사명은 노유(老幼) 곧 수명을 맡고, 사재(司災)는 재앙과 허물[災咎]을 주관한다고 하였다. 사중(司中) 대신에 사재(司災)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서는 문창 6성을 관직과 연결 지어 해석하였다. 또한 제1성은 북두 두괴에 가까운 내계성(內階星)에서 기산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천문류초(天文類抄)』에도 문창성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진서』「천문지」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하늘의 법도를 총괄하여 집계하는 하늘의 육부로 설명하였으며, 내계성에서부터 6개의 별을 차례로 제1상장성 등으로 열거하였다. 문창 6성을 오늘날의 별자리로 동정(同定)하면 다음과 같다.

문창 제1상장성(上將星) 대장군(大將軍) 23 UMa 3.67

문창 제2차장성(次將星) 상서(尙書)υ UMa 3.80

문창 제3귀상성(貴相星) 태상(太常)φ UMa 4.59

문창 제4사록성(司祿星) 사중(司中)·사예(司隸) θ UMa 3.17

문창 제5사명성(司命星) 사괴(司怪)·태사(太史) 15f UMa 4.48

문창 제6사구성(司寇星) 대리(大理) 18 UMa 4.83

제1상장성의 경우 3.36등성의 큰곰자리 ο별이나 6.34등성의 큰곰자리 28번 별로 동정하기도 하는 등 정확히 어떤 별을 가리키는지 논란이 있다. 또한 실제 별의 밝기로 볼 때 문창 6성은 3~5등성 사이로 어두운 편에 속하는데, 특히 제5사명성과 제6사구성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당나라 때의 천문서인 『보천가(步天歌)』에서는, 문창성이 북두 위에서 반달 모양으로 빛나지만, 드물면서도 성긴 6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묘사하였다.

그럼에도 문창성은 북두의 두괴 머리맡에서 둥근 광주리 형태를 이루어 문정(文精)을 모아 담아내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일찍부터 중요한 천상의 관부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이 별자리를 문운(文運)의 창성을 주관하는 ‘문창궁’으로 부르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이후 문창을 주관하는 천상의 관부로 전승되었다.

문로(文路)와 학문을 관장하는 천상의 총괄 관부로서 문창궁이 성립된 이래, 문창성은 여러 방면으로 그 역할이 변모되었다. 특히 풍수학과 명리학 영역에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문창귀인(文昌貴人)과, 도교 판테온에 이름을 떨친 문창제군(文昌帝君)은 문화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먼저 명리학에서 문창성은 문성(文星)이라고도 불리는데, 연간(年干)과 일간(日干)을 보아 식신(食神)의 임관궁(臨官宮) 관계가 있으면 그 명궁(命宮)에 길성(吉星)인 문창귀인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식신의 작용이 자신의 몸을 설기(泄氣)시켜 빼어난 기운을 토하는 것이어서 상생 관계를 가진 경우인데, 갑(甲)의 식신은 병(丙)이며, 병의 녹(祿)이 사(巳)에 거하므로, 갑에게는 사가 문창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을(乙)에게는 오(午)가 문창에 해당한다. 예컨대, 을유생(乙酉生)이나 을일생(乙日生)인 사람의 팔자 중에 오(午)가 보이면 문창귀인이 있는 경우가 된다.

태세(太歲) 문창도 연간(年干)으로써 문창귀인을 논하는 방식인데, 갑신년이면 문창이 사위(巳位)에 있고, 을유년이면 오위(午位)에 위치한다. 병과 무의 해이면 문창은 신위(申位)에 있고, 신년이면 해위(亥位)에 있고, 임년이면 인위(寅位)에 있으며, 계년이면 묘위(卯位)에 위치한다.

갑→사(巳), 을→오(午), 병→신(申), 정→유(酉), 무→신(申),

기→유(酉), 경→해(亥), 신→자(子), 임→인(寅), 계→묘(卯).

이런 길신(吉神)의 작용을 풍수 방위로 확대하면, 명리의 문창귀인과 태세의 문창귀인이 소재한 방위를 문창위(文昌位)라 일컬으며, 문창위에 문필봉(文筆峰)이나 필가봉(筆架峰)이 있으면 문운에 이롭다고 여겼다.

명나라 때는 학업과 관직, 사업과 건강을 돕는 데 효험이 있다는 문창부주(文昌符咒)도 유행하였다. 명나라 신종 연간에 번옥형(樊玉衡)이 지은 『삼역연부(三易衍符)』에 따르면, 글방의 사방에 방위별로 동벽에는 청룡부[惡念辟邪], 서벽에는 백호부[不祥辟邪], 남벽에는 주작부[口舌辟邪], 북벽에는 현무부[萬鬼辟邪], 책상에는 황룡부[妖魔辟邪]를 그려 붙여 문창결인(文昌結印)을 행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공부하는 방에서 앉는 방향을 정하는 데도 문창위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방문이 동향이면 좌서조동(坐西朝東)의 태택(兌宅)이라 일컫고 서남위를 길하다고 여겼다.

한편 도교의 신위인 문창제군은 고시(考試)와 문운(文運)을 직접 돕고 주관하는 신격으로서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 이르러 관민에게 크게 숭상되었다. 문창제군은 동제군(梓潼帝君)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재동제군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 맞서 싸우다 죽은 역사 인물인 동진의 장육(張育)과 사천성 재동군의 지역 수호신인 재동신(梓潼神)이 서로 결합된 것이었는데, 원나라 때 문창성신(文昌星神)과 다시 습합하여 문창제군[輔元開化文昌司祿宏仁帝君]으로 재탄생하였다. 송원(宋元) 시기에 편찬된 『문창제군본전(文昌帝君本傳)』과 『문창제군음즐문(文昌帝君陰騭文)』 등은 당시에 유행한 도교의 신관(神觀)을 반영한 책들인데, 여기서 문창제군은 문운과 문장을 주관하는 문신(文神)으로, 인간의 선복(善福)을 돕는 수호신으로 정의되어 있다. 또한 직접적으로 과거 시험과 재록을 주관하는 사록직공거진군(司祿職貢擧眞君)으로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청나라 인종은 1801년 여름에 문창제군의 성적(聖蹟)이 높다 하여 관성제군(關聖帝君)과 동일한 수준으로 국가 사전(祀典)에 편입하였다. 그 뒤로 관성제군을 필두로 하여, 문창제군과 부우제군(孚佑帝君)을 삼성(三聖)으로 받드는 관성 신앙이 더욱 유행하였고, 그에 따라 『삼성훈경(三聖訓經)』, 『태상감응편도설(太上感應篇圖說)』, 『경신록(敬信錄)』, 『남궁계적(南宮桂籍)』 등의 각종 권선서(勸善書)들이 다량 편찬 유포되었다. 이러한 관성 신앙은 조선후기 사회에서도 성행하여, 정조 말년부터 19세기 말 고종 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많은 권선서의 한글 언해본이 편찬되고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장가인 이건창(李建昌)이 쓴 『남궁계적』의 서문에 따르면, 관성제군이 무신(武臣)의 대표라면 문창제군은 문신(文神)의 대표로서 이들이 함께 문무의 이제(二帝)를 이루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문창제군은 중국의 명·청(明·淸)대뿐 아니라 조선후기 사회에서도 권선(勸善)과 문운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널리 숭상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창성과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유성의 관측 위치를 설명하는 별자리로서 등장하고 있다. 다만 고종 연간에는 당시 성행한 문창의 권선음즐신앙 때문인지 문창성에 비유한 기사가 눈에 띈다.

1879년(고종 16) 조성교(趙性敎)는 체차(遞差)를 요청하면서, ‘정경은 높은 직위입니다. 구경(九卿)과 육부(六府) 상서(尙書)들이 문창부(文昌府)를 본받아 아름답고 훌륭한 계책을 바치고 사무를 종합하며 분장하는 국가의 중요 기관으로, 예부터 덕망 있는 자를 뽑아 삼았던 자리인데, 못나고 우둔하여 이에 만분의 일도 가깝지 않은 신을 어찌 대신들은 천거하고 성상께서 뽑으시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고종실록』 7년 1월 24일). 여기서 문창부는 문창성을 일컫는 것으로, 상서육부와 동일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삼국사기(三國史記)』
  • 『천문류초(天文類抄)』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즈윈, 2008.
  • 김일권, 「한말시기 도교적인 종교정체성과 삼교통합주의 흐름 - 관왕신앙의 성장과 선음즐교의 전개를 중심으로」, 『종교연구』32집,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