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충(武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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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에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된 명나라 관인.

개설

무충은 명나라 관리로, 1459년(세조 5) 4월 8일에 건주위(建州衛)에 가서 여진이 조선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견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조선이 낭발아한(浪孛兒罕)을 살해한 까닭을 묻기 위하여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활동 사항

무충은 1459년 4월 8일에 건주위에 가서 건주위가 명을 배반하고 조선에 귀순한 것을 책망하면서, 작은 이익을 탐해 큰 것을 잃지 말라는 언급과 함께 조선과의 왕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무충 등은 여진 추장 이만주(李滿住)와 고라합(古羅哈) 등 4명을 데리고 명에 갔는데, 이만주는 병이 나서 그의 아우 아고을(阿古乙)을 대신 보내기도 하였다. 명이 이러한 조치를 한 것은 당시 조선이 건주위 여진과 빈번한 교류를 하는 것에 대하여, 조선이 그들과 관계를 맺고 명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세조는 여진인의 상경을 제한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5년 4월 15일). 명의 조선 견제에 대하여 조심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세조는 강계절제사(江界節制使)홍흥조(洪興祚)을 시켜 여진인에게 무충 등의 왕래 이유 등에 대하여 묻기도 하였다(『세조실록』 5년 4월 15일). 명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명은 조선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는 모련위도독첨사(毛憐衛都督僉事)건주우위도지휘(建州右衛都指揮)동화이치[佟火儞赤]가 조선이 낭발아한을 살해한 사실을 명에 알리자, 그 이유를 묻기 위하여 1460년 3월 2일에 무충 등을 보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충은 장녕(張寧)과 같이 왔는데, 이들은 명의 대관(大官)인 낭발아한을 조선이 함부로 처형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낭발아한 등은 조선의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백성과 다름없으며, 증거가 명백한 도적들이었으므로 처리를 늦출 수 없다고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에 온 무충은 조선 병사를 검열하기를 청하였는데, 화살을 쏘아보겠다고 하면서 활이 약하다고 하며 꺾어 버렸다. 때마침 기러기가 날아가자 활을 쏘아 마쳤다고도 한다.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한 행위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來朝)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이규철, 「조선초기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황선희, 「세조 초기의 여진관계와 북정(北征)」,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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