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武藏)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일본의 옛 국(國) 중 하나.

개설

동해도(東海道)에 속하였으며, 현재의 동경도(東京都)와 기옥현(埼玉縣)의 전 지역과 신내천현(神奈川縣)의 동부(東部)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무주(武州)·무장국(武藏國)으로도 불리었다.

형성 및 변천

처음엔 동산도(東山道)에 속해 있었지만 771년(혜공 7) 동해도(東海道)로 바뀌었다. 21개 군(郡)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중세에는 하총국(下総國) 갈식군(葛飾郡)의 일부를 편입하고, 다마군(多麻郡)이 다동(多東)·다서(多西) 2개의 군으로 되는 등 동서로 분할되어 24개 군이 되었다고 한다. 국부(國府)와 국분사(國分寺) 모두 다마군에 설치되었으며, 강호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정치·경제·문화를 중심지였다.

8세기에는 조선으로부터 활발하게 도래인을 이주시켜 개발하게 하여 고려(高麗)·신라(新羅)·신창(新倉)·박강(狛江)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9세기에는 인구가 139,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율령제가 완화되면서 횡산(橫山) 장원, 소산전(小山田) 장원, 도모(稻毛) 장원이 성립하고, 무장 각지에 기반을 가진 무사집단이 성장하여 중세 무가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겸창막부(鎌倉幕府)가 시작되자 동북·북국(北國) 지방과의 연락을 위하여 무장 대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겸창가도(鎌倉街道)가 개통되어 무사들이 활발하게 왕래하였다.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족리존씨(足利尊氏)가 수호(守護)가 되었고, 고(高), 상채(上杉), 인목(仁木), 전산씨(畠山氏)를 거쳐 실정시대(室町時代)에는 상채씨의 지배 아래 놓여졌다.

1457년 태전도관(太田道灌)이 강호성(江戶城)을 축조하여 위세를 떨쳤지만 전국시대에는 상모국(相模國) 소전원(小田原)을 본거지로 한 후북조씨(後北條氏)가 진출하였다. 1590년 후북조씨 대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관동(關東)으로 들어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된 후 강호에 막부를 열었다. 이후 15대에 걸쳐 약 300년간 덕천시대가 지속되었으며, 무장은 시종 그 권력 기반이 되었다. 1868년 무장현지사(武藏縣知事), 이어서 동경부(東京府)가 설치되고, 품천현(品川縣)·구산현(韮山縣)·소관현(小菅縣) 등을 설치·통폐합하여 1593년에 이르면 거의 현재의 동경도·기옥현·신내천현 일부가 되었다.

위치 비정

동쪽은 하총(下總), 남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동경만(東京灣)과 상모국(相模國), 서쪽은 관동(關東) 산지가 나란히 갑비(甲斐)에 접해 있고, 북쪽은 상야(上野)·하야(下野)와 마주하고 있었다. 중앙부는 관동의 풍화(風化)된 퇴적물인 롬(loam)층으로 덮여 있는 광대한 무장야(武藏野)의 평야였다.

관련 기록

1705년(숙종 31)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진(宗義眞)이 죽고 그 아들 의방(義方)이 그 뒤를 이어받게 되어 조선에서 역관(譯官) 2명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다. 이들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 1703년(숙종 29) 11월 21일 일본 동해도(東海道) 15주(州) 안의 무장(武藏) 등 6개 주에 한꺼번에 지진이 났다는 내용이 있다(『숙종실록』 31년 2월 18일).

1809년(순조 9) 도해역관(渡海譯官)현의순(玄義洵)·최석(崔昔) 등이 대마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별단(別單)으로 보고한 내용 중에 관백은 무장주(武藏州)에 있고 왜황(倭皇)은 대화주(大和州)에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순조실록』9년 12월 2일).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ー,『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