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덕문(武德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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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북쪽 궁장에 설치된 궁문.

개설

1616년(광해군 8)에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사직단 남쪽 새문안동에 경덕궁을 새롭게 짓기 시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경덕궁은 완공되었으나, 인경궁은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1623년(광해군 15)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은 새 궁궐을 사용하지 못하고 폐위되었다.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터에 건립된 것으로 인조반정 이후에 인조가 사용하면서 궁궐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 폐정의 상징으로 여겨져 1633년(인조 11)부터 철거되었고, 창덕궁과 창경궁 수리공사 때 재목으로 사용되었다. 경덕궁은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을 처음 조성할 때 궁역을 둘러 궁장을 쌓고 정문은 동남쪽 모서리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다.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외에도 궁문을 사방에 두었는데, 동쪽에는 흥원문(興元門)을 지었고,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을 두었으며,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을 내고,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을 설치하였다. 무덕문 밖에는 사직단과 옛 인경궁터가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인조대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인경궁을 사용하였는데, 인조는 인목대비를 문안할 때 무덕문을 통해 경희궁을 나서서 인경궁으로 거둥하였다(『인조실록』 8년 3월 18일). 영조는 사직단이 내다보이는 무덕문에서 사직단을 향해 부복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8년 6월 29일)(『영조실록』 48년 12월 30일).

변천 및 현황

무덕문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경희궁의 건물이 철거된 1900년(광무 4) 무렵일 듯하다.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하여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재목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은 공허지가 되어 용동궁(龍洞宮),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과 함께 경작지로 분배되었다. 이때 경희궁의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1892년(고종 29)경에 그려진 「슈션젼도[首善全圖]」에는 경희궁의 궁장과 궁문이 그대로 그려졌으나, 1911년에 제작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에는 경희궁의 경계가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아마도 이즈음에 궁장이 허물어지고 무덕문도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형태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무덕문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계상당(啓祥堂)과 광명전(光明殿) 북쪽에 있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동쪽의 1칸은 협문으로 지붕의 높이를 낮추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서궐도안(西闕圖案)」
  •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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