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회시(武科會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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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무관을 선발하기 위하여 실시한 무과의 제2차 단계의 시험으로, 무과복시라고도 함.

개설

고려시대에 일시적으로 무관을 선발하기 위한 무과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회시(會試)가 마련되었다는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말에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도입되면서 회시가 등장하였으나 무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에 이르러 처음 실시되었다. 제1차 시험인 초시에 통과한 사람을 대상으로 전형을 해서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전시는 합격자의 석차를 정할 뿐이며 회시에서 실제 급제 여부가 결정되었다. 『경국대전』에는 회시 대신 복시가 정식 용어로 수록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예종·인종대에 걸친 짧은 기간에만 무관의 선발을 위한 무과를 실시하였다. 그 밖에는 실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상당수가 과거 선발자들로 구성된 문관과의 사이에 신분 격차가 발생하는 요인이 되었다. 자연히 두 계층 간에 불화가 발생하면서 상호 갈등과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마침내 무신의 난과 같은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양자 간의 마찰이 지속되었다.

고려말에 이르러 분열과 대립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무과를 실시하도록 추진하였다. 마지막 왕인 공양왕대 비로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혼란한 정국 상황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곧바로 발표된 태조 즉위 교서에 무과 실시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계가 혼돈 속에 있었고 특히 종전부터 지속되었던 군대 내부의 사병적(私兵的)인 관계가 청산되지 못한 채 온전해 있었기 때문에 무과를 실시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태조의 후계자 선정 문제로 인하여 발발하였던 왕자의 난을 통하여 집권에 성공한 태종은 우선적으로 사병 혁파부터 추진하였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자 1402년(태종 2)에 무과를 정식으로 실시하였다. 최초의 성문 법전인 『경제육전』의 무과법(武科法)에 의거하되 세부적인 것은 기존 문과의 예에 따랐다(『태종실록』 2년 1월 6일).

그런데 고려말부터 소위 과거삼층법이 도입되어 제1차 단계 시험인 향시(鄕試)를 통과해야 제2차 단계 시험인 회시에 응시할 수 있으며 회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최종 시험인 전시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경제육전』의 무과법에는 과거삼층법이 상세하게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실시하였을 때에는 문과의 예를 따라 과거삼층법을 적용하였다. 그 결과 최초로 실시된 무과부터 회시가 시행되었다. 즉, 향시를 통과한 자들을 대상으로 2차 시험을 실시하였다. 결국 조선에 들어와 무과에서 회시가 처음으로 시행된 셈이었다.

내용

1402년 처음 실시할 때부터 무과회시에서는 『경제육전』의 무과법에 따라 이른바 삼장체제(三場體制)를 거치도록 하였다. 즉, 초장(初場)에는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을, 중장(中場)에서는 기사(騎射)와 기창(騎槍)을, 그리고 마지막 종장(終場)에서는 『무경(武經)』을 시험 보았다. 그런데 초창기에는 회시에서 삼장연권법(連卷法)을 적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초장을 통과하지 못한 자는 중장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너무 가혹하다고 여겼는지 1414년(태종 14) 이후에는 문과의 예에 의거해서 삼장통권법(三場通卷法)을 채택하였다. 즉, 초·중·종장의 모든 점수를 합산해서 획득하였던 성적순대로 합격자를 뽑아 최종 시험인 전시로 올리는 제도였다.

회시의 선발 인원은 처음 실시하였을 때부터 28명이었다(『태종실록』 2년 1월 6일). 28명의 합격 정원은 정규시인 식년시의 경우에 후대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회시를 통과한 자들은 사실상 최종 합격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는 다만 최종 합격자의 석차를 정하였을 뿐 탈락 여부를 가리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부득이한 사유로 전시를 응시하지 못한 자는 합격자 명단인 방목의 끝에 수록하거나 다음 전시에 응시할 기회를 주었다.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무장인 최윤덕(崔潤德)은 회시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를 따라 이성(泥城)을 수비하라는 왕명으로 받고서 출동하였던 관계로 부득이 전시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합격자 명단인 방목에는 이름이 올랐다(『태종실록』 2년 4월 10일). 즉, 정식 합격자로 처리되었다. 그런 사례는 후대에도 적용되었다.

초창기 시험관은 무관(武官)으로서 의정부와 중추부 양부(兩府) 이상 2명만 뽑아 1명은 감교시(監校試), 다른 1명은 동감교시(同監校試)로 삼도록 한다는 원칙에 따라 무과 회시감교관(武科會試監校官)과 동감교관(同監校官)을 두었다(『태종실록』 2년 4월 13일). 하지만 1410년(태종 10)에 문무과의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를 철폐하라는 지시에 따라 무과의 감교시제도 혁파되었다. 그 대신 훈련관이 주관하되 병조와 함께 시취하며 대간으로 하여금 고시에 참여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0년 2월 19일). 즉, 특정 인물이 아닌 관서가 책임지고 시험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변천

제2차 시험에 해당하는 무과회시가 『경국대전』에 이르러서는 무과복시로 규정되었다. 다시 말하여 법전의 정식 명칭이 회시가 아닌 복시로 정하여졌다. 원래 복시는 고려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말이다. 즉, 왕이 직접 행하는 재시험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로 인하여 최종 시험을 뜻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려말에 이르러 과거삼층법이 도입되면서 전시가 최종 시험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내우외환으로 정치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과거삼층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하여 전시가 최종 시험이라는 의미도 널리 활용되지 못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초창기에는 종전처럼 복시가 최종 시험, 다시 말하여 전시를 가리키는 말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태종·세종대에 이르러 과거제 전반에 걸쳐 제도 개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과거삼층법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에 전시가 일반적으로 널리 활용되면서 복시가 최종 시험이 아닌 단지 제2차 단계 시험이라는 뜻으로만 인식되었다. 마침내 복시가 회시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경국대전』에 이르러 문무과 모두 회시를 대체하는 법률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무과총요(武科總要)』
  • 심승구, 「조선초기 복시에 대한 검토」,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윤훈표, 「조선초기 무과제도연구」, 『학림』9, 1987.
  • 이성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한국사 23-조선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