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등준시(武科登俊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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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조대와 영조대에 무관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특별 무과 시험.

개설

조선시대에는 신진 무관을 선발하고자 무과를 실시하였는데, 관직에 오르면 더 이상 재주를 연마하지 않아 실력이 저하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를 막고자 당하관(堂下官)을 대상으로 중시(重試)를 실시하여 우수자를 승진시키는 방법을 권장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각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조금 더 특별한 중시를 실시하였는데, 곧 재상과 종친까지 응시할 수 있는 무과등준시였다. 이는 이후 영조대 한 번 더 실시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본래 무과는 신진 무관들을 선발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태종대 기성 관료들이 평소에 재주를 연마하지 않아 실력이 날로 줄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이에 당하관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아 성적 우수자를 포상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하여 무과에 합격한 뒤에도 항상 무예를 연마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것이 곧 중시로 10년마다 1번씩 실시하도록 하였는데, 무과의 경우 1410년(태종 10)에 처음 시행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폭력을 동반한 정권 장악에 따른 민심 악화를 우려해 과거를 자주 실시해서 민심 회유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비정규시를 실시하였는데 중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아가 기존의 것보다 더 특별한 것을 실시하였으니, 그중의 하나가 등준시였다. 1466년(세조 12)에 실시하였는데, 문과를 먼저 행하고 무과를 바로 이어 거행하였다. 같은 해에 실시된 비슷한 성격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재상까지 응시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는데, 등준시에서는 종친까지 확대하였다(『세조실록』 12년 7월 24일). 중시는 원래 당하관까지만 응시를 허용하였는데, 발영·등준시는 그것을 뛰어넘어 최고위 관직자나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종친까지 시험을 보게 하였다. 따라서 이는 당시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실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용

등준시는 정기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왕명에 의거하여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초시와 전시 2단계로 나뉘어졌다. 초시의 경우에는 강서(講書)시험도 보았는데, 임금이 직접 응시한 종친과 재추(宰樞) 등을 불러 강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2년 9월 12일). 그리고 왕세자로 하여금 합격자 51명을 선발하게 한 다음에 관시(館試)의 분수(分數)를 합산하여 그 적고 많음에 따라 차례를 매기게 하였다(『세조실록』 12년 9월 23일). 그리고 왕 앞에서 활쏘기 시험을 실시해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최적(崔適)을 장원(壯元)으로 삼았다. 이때 이준(李浚)을 필두로 종친 5명이 포함된 총 51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자궁(資窮)을 논하지 않고 모두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기 때문에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된 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세조실록』 12년 9월 25일). 이 시험에서는 다른 시험에서는 볼 수 없는 특혜가 베풀어졌다.

변천

세조대를 제외하고는 등준시가 실시된 적이 없다가 영조대에 이르러 세조대의 고사(故事)를 따라 등준시를 실시하였다. 1774년(영조 50)에 왕이 직접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거둥하여 문과 15명, 무과 18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모두 화상(畵像)을 그려 도첩(圖牒)을 만들어 문과는 예조에, 무과는 병조에 간수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50년 1월 15일). 이 역시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무과총요(武科總要)』
  • 최옥환, 「조선 세조대의 발영시와 등준시」, 『대동사학』 1, 2002.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