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칠서(武經七書)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국 송나라 때에 편찬된 7가지의 병서(兵書)로, 조선시대 무인들의 필독서.

개설

조선시대 무인들의 필독서이자 대표적인 병서들이다. 일명 칠서(七書) 또는 무경(武經)이라고도 하였다. 제(齊)나라 손무(孫武)가 쓴 『손자(孫子)』 1권, 전국시대 오기(吳起)의 『오자(吳子)』 1권, 제(齊)나라 사마양저(司馬穰苴)의 『사마법(司馬法)』 1권, 주나라 울요(尉繚)의 『위료자(尉繚子)』 5권, 당(唐)나라 이정(李靖)의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3권,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의 『삼략(三略)』 3권, 주나라 여망(呂望)의 『육도(六韜)』 6권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 송(宋)나라 원풍(元豊) 연간에 이들 병서를 무학(武學)으로 지정하면서 ‘칠서’라고 호칭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때부터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송나라 무과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무경칠서』에 관한 참고서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송나라 증공량(曾公亮)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무경총요(武經總要)』 40권, 금(金)나라 시자미(施子美)가 엮은 『칠서강의(七書講義)』 12권, 명나라 유인(劉寅)의 『칠서직해(七書直解)』 12권, 황헌신(黃獻臣)의 『무경개종(武經開宗)』 14권 등이 있었다.

『무경칠서』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무과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된 이후 무인들에게 필수적인 병서가 되었다. 하지만 『무경칠서』가 중국의 역대 전략과 전술을 다룬 병서였던 만큼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1452(문종 2)에는 왕명에 의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이『무경칠서』에 주해를 달고, 뒷날 최항(崔恒)을 시켜 다시 교정하게 한 다음,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 결과 『무경칠서주해』 10권 5책이 탄생하였다.

『무경칠서』 중에서 『손자』는 11명 대가(大家)의 주해가 있었으나 그릇된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 밖의 서적에 대해서는 주해가 없었으므로 세조가 처음으로 주해를 단 셈이었다. 그 후에도 조선왕조는 끊임없이 『무경칠서』와 관련된 각종 해석서를 편찬하였다. 『무경칠서』가 무과의 과목이 되자 무과 응시자들에 의하여 그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지속적으로 『무경칠서』를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결국 『무경칠서』는 비록 중국 고대의 병서였지만, 주석을 통하여 조선왕조가 주체적으로 소화해 낸 병서로서 조선시대 군사전략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였다.

편찬/발간 경위

『무경칠서』는 이태조의 즉위교서에서 무학(武學) 교육과 무과의 시험 과목으로 언급된 이래 조선시대 내내 병서의 골격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무과를 시행하는 자리에서 『무경칠서』는 마보 무예와 함께 무과 시험 과목으로 정비되었다(『태종실록』 2년 1월 6일). 초장과 중장에서는 무예를 종장에서는 『무경칠서』를 시험보았다. 그러나 무예보다 지략을 더 중시하였던 조선왕조는 무예가 좀 부족하더라도 『무경칠서』에 정통할 경우에 무사들을 훈련시킬 만하다 하여 관직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가 무학 교육과 무경습독관을 취재할 때에도 『무경칠서』는 기본적인 교재였다. 조선왕조는 무학(武學)을 교육하기 위해서 『무경칠서』, 『진도(陣圖)』, 『장감박의(將鑑博義)』, 『태일산(太一算)』을 시험 보았다. 아울러 선전관 취재에도 『무경칠서』가 포함되었다.

성종대부터는 무예도시의 시험 과목 중에 『무경칠서』를 시험 보되 『오자』는 제외하고 대신 경서를 시험보게 하였다. 그 까닭은 오기가 증삼의 수제자로서 모친상을 당하고도 상례를 참석하지 않은 불효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종대에는 다시 『손자』와 『오자』 등의 병서를 다시 인간하도록 하였다. 또한 성종 25년(1494)에는 사신을 다녀온 하숙부(河叔溥)가 『집주무경칠서(輯註武經七書)』와 『진서(陳書)』를 올렸다(『성종실록』 25년 9월 16일).

1495년(연산군 1)에는 “강시보(江時溥)가 바친 『무경칠서』와 『대관의두』를 간행해 배포하도록 하였다. 1518년(중종 13)에는 평안도절도사의 소장에 의거하여, 평안도 무사들에게 『무경칠서』 이외에 『소학』과 경서를 보내 읽히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3년 7월 2일). 당시 『무경칠서』는 국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적어 문무관의 소장본을 받아 인출하게 하였다. 『무경칠서』는 을해자(乙亥字)와 경진자(庚辰字)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대 이전에는 적어도 2차례 이상 인간하였다. 1607년(선조 40)에는 정미자 『무경칠서』를 인간하였다. 인조대에는 일본에서 『무경칠서직해』를 요구해 오기도 하였다.

1679년(숙종 5)에는 김석주가 『무경칠서』의 요지를 총괄하고 병기(兵機)에 긴요한 것을 뽑아 『행군수지(行軍須知)』를 만들었다(『숙종실록』 5년 3월 11일). 영조대에는 전경무신 전강에 『무경칠서』를 시험보도록 하였다. 이때 『무경칠서』 중 『오자』는 제외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무경칠서』의 주석은 풍부한 형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무경 칠서의 주석이 소략하니 반드시 이들 책을 잘 익힌 자를 찾아서 편집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20년 12월 13일).

서지 사항

목판본(木版本)

간사지미상(刊寫地未詳), 기영(箕營), 정조 11년(1787)

四周單邊 半郭 21.3 x 16.5 cm

有界 半葉10行17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30.3 x 21.0 cm

表題 : 武經七書

刊記 : 丁未(1787)四月日箕營開刊

紙質 : 楮紙

구성/내용

『무경칠서』는 『손자』·『오자』·『사마법』·『위료자』·『황석공삼략』·『육도』·『이위공문대』 7가지의 병서로 이루어졌다. 그중 『손자』는 칠서 중 가장 오래된 병서로서, 국방계획인 시계(始計)에서 동원계획인 작전(作戰), 국가전략인 모공(謀攻), 군사전략인 형(形), 전쟁기술인 세(勢), 기만전술인 허실(虛實), 작전목표인 군쟁(軍爭), 지휘통솔책인 구변(九變), 용병술인 행군(行軍), 지형학인 지형(地形), 지형의 활용인 구지(九地), 화공전인 화공(火攻), 정보전인 용간(用間)에 이르기까지 총 13편으로 구성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총망라되었다. 또한 전략뿐 아니라 인사 전반에 걸쳐서도 비범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손자』는 병서로서만이 아니라 『오자』와 함께 조선시대의 역과(譯科) 중 여진학(女眞學)의 시험 과목으로 사용되었다.

『오자』는 전국시대에 오기(吳起)가 서하 지역을 지키던 27년 동안에 전쟁을 틈타서 작전의 경험과 연구 성과를 총합하여 저술하였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오자』는 원서가 본래 48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6편만이 후대의 정리를 거쳐 전해질 뿐이다. 6편의 내용은 국가 경영론인 도국(圖國), 적정 판단론인 요적(料敵), 군 운용론인 치병(治兵), 지휘관 자질론인 논장(論將), 임기 응변론인 응변(應變), 사기 진작론인 여사(勵士)였다. 이 책은 오기의 문도가 편찬하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오기는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수제자 증삼(曾參)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오기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귀국하지 않았으므로 스승에게 불효자라는 질책을 받고 문하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오기는 유학(儒學)을 포기하고 병법에 몰두하여 3년 만에 큰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오기의 불효는 조선후기에는 『무경칠서』 중 유독 『오자』를 제외하는 배경이 되었다.

『사마법』 역시 1권이고, 정치의 기본 인본(仁本), 천자의 도리 천자지의(天子之義), 국방의 요체 정작(定爵), 기강의 확립 엄위(嚴位), 병력의 활용 용중(用衆)까지 5편으로 구성되었다. 『사마법』은 그 원류가 태공 여상으로부터 전해지고, 여기에 전양저의 병법이 추가되어 제위왕대 집대성된 것이었다. 원래 155편은 후세로 전해지면서 대부분 잃어버리거나 합쳐져 5편만이 현존하게 되었다.

『위료자』는 『손자』에 필적할 만한 병법서로서 전승의 주체인 천관(天官), 지휘통솔인 병담(兵談), 군사제도인 제담(制談), 전비의 위력인 전위(戰威), 공격 방법인 공권(攻權), 수비 방법인 수권(守權), 지휘관의 고려사항인 십이릉(十二陵), 국방력과 전쟁의 함수인 무의(武議), 지휘관과 군법인 장리(將理), 직무분담인 원관(原官), 부국강병의 도리인 치본(治本), 전술 방법론인 전권(戰權), 전시군법인 중형령(重刑令), 편제 및 연대책임인 오제령(伍制令), 관할 지역의 통제인 분새령(分塞令), 상벌 및 즉결처분인 속오령(束伍令), 부대 운용인 경졸령(經卒令), 통신 훈련인 늑졸령(勒卒令), 출정의식인 장령(將令), 선발대 편성인 종군령(踵軍令), 부대교육 병교(兵敎), 용병의 원칙인 병령(兵令) 등 모두 23편이 기록되었다.

『이위공문대』는 당나라 태종과 이정과의 병법에 대한 문답을 수록한 것으로 상중하의 3권으로 된 병서였다. 『당태종이위공문대』라고도 하며, 『위공문대』로 약칭하기도 하였다. 이 병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전에 대비하여 날카로운 질문으로 병학에 정통한 이정의 군사 지식을 충분히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내용은 상·중·하 3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는 단지 책의 분량을 안배하기 위한 것이고 상편에 기정(奇正)의 운용·진법토론·병서토론·전차대의 편제·한병과 번병의 운용, 중편에 허실의 형세·대오의 편성·육화진·깃발의 활용·기병의 편제·진형·장수의 위엄·첩자의 활용·군세의 역전, 하편에는 지형의 활용·병력의 분산과 집중·적의 실수유도·장수의 통솔·장수의 임명·음양설의 활용·결전의 기회 포착·병법의 정수 등 병학사상을 포괄적으로 담았다. 또한 이정은 이 책의 서두에서 고구려 정벌전에서 정병(正兵) 전술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육도』는 주 문왕을 보필해 주나라를 창건한 강태공의 병서였다.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의 6가지 도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략』과 함께 가장 오래된 병법서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태공을 병학의 시조로 받들며 무묘(武廟)에 모셨다.

『삼략』은 보통 『육도삼략』이라 하듯이, 『육도』와 병칭되었다. 상략·중략·하략으로 되어 『삼략』이라고 하며 황석공이 태공 여상의 병법을 부연하여 편찬하였다고 해서 『황석공삼략』이라고도 하였다. 고대 병법서에서 『손자』와 『오자』 이전의 병서는 대체로 군사적인 내용에 국한하지 않고 치국의 태도를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특히 『삼략』은 유가사상과 도가사상, 관중과 손무의 병학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인의 도덕과 예악을 강조하고 민본정치를 말한 것은 유가사상이고, 무위(無爲)의 덕화(德化)를 주장하고, 유약(柔弱)이 강강(剛强)을 제압한다는 겸덕론(謙德論)이었다.

의의와 평가

『무경칠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전란기를 거치면서 축적된 실전 경험과 인본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병서였다. 치병(治兵)과 용병(用兵)의 원리뿐 아니라 치국(治國)의 도리까지 포괄하고 있어 현대의 병학이론이 정립되기 전까지 경세(經世)와 제승(制勝)의 지침서로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무과의 시험 과목이자 무학(武學) 교재로서 무신들의 필독서로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략을 세우는 등 군사를 부리는 방법을 총망라하였다. 이처럼 『무경칠서』는 중국의 병서였으나, 한중일 삼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공유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세계의 병학서로서 인류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수교집록(受敎輯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무경칠서(武經七書)』
  • 『대동야승(大東野乘)』
  • 『무과총요(武科總要)』
  • 『무과방목(武科榜目)』
  • 『과거등록(科擧謄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황병국, 「무경칠서 해제」, 『군사』 14, 군사편찬위원회, 1987.
  • 하차대, 「조선초기 군사정책과 병법서의 발전」, 『군사』 19, 군사편찬위원회, 1989.
  • 장학근, 「선초 무경칠서의 도입배경」, 『동서학회』 2, 한국동서사학회,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