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화승(募化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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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사찰의 중건 및 불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속인에게 보시를 구하던 승려.

개설

모화승(募化僧)이란 세속인들에게 시주를 권유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승려를 말한다. 모화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불사(佛事)에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므로, 대개 불사의 취지를 기록한 권선문(勸善文) 혹은 모연문(募緣文)을 지니고 모화 활동을 한다. 그러나 모화에는 세속인들에게 공덕을 쌓을 것을 장려하는 불교 본연의 정신도 담겨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모화를 주도하는 승려가 따로 있었으며, 불사의 종류에 따라 새로이 모화승이 지정되기도 하였다. 승려와 다른 계층이 함께 나서거나, 모화승의 인솔 아래 일반 백성이나 노비 등이 무리를 이루어 모화 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유교 이념에 밀려 불교가 억압을 받던 시기여서, 승려들의 모화 활동을 비판하고 금지할 것을 주장하는 여론이 일반적이었다.

내용 및 특징

모화는 사찰의 창건이나 중건, 불상·불탑·범종(梵鐘)의 조성, 대장경과 불구(佛具)의 마련, 물과 뭍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는 수륙재(水陸齋) 같은 각종 제사에 드는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행해졌다. 즉 상당한 경제력을 필요로 하는 불사가 있는 경우에 이루어졌다.

모화 활동은 승려 개인이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장(社長)이라 불리는 불교 신자 집단을 데리고 다니며 하는 경우도 많았다. 모화에 나선 승려들은 불사의 성격에 따라 곡물을 비롯해 동철(銅鐵)·베·화폐·음식·먹·기름 등 다양한 품목을 시주 받았다.

모화는 불교 경전의 사경(寫經)이나 인출(印出) 등을 위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1414년(태종 14) 7월에는 승려들이 대장경을 인출하고자 태종과 상왕(上王)태조의 글을 받아 전라도 지역에서 모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신료 및 지배층 사이에 불교를 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승려의 도성 출입 통제, 모화 금지 조치 등 억압과 통제가 심하였다. 조선초부터 유학자 관료들은 모화를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 행위로 인식하여 엄격히 금지하였으며, 이를 어길 겨우 중벌에 처하였다. 또한 관이나 왕실의 인장이 찍힌 권선문을 지닌 이들만 모연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정에서 모화 활동을 엄격히 통제함에 따라 사찰의 자체적인 모화는 점점 어렵게 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예컨대 1712년(숙종 38)에는 도성의 흥원문(興元門)을 함부로 출입한 모화승을 감옥에 가둔 일도 있었다(『숙종실록』 38년 10월 28일). 이에 따라 도성 내의 모화 활동은 승려들을 대신해 일반 신도들이 대행하게 되었고, 승려들의 모화 활동은 주로 지방에서 이루어졌다.

모화승은 한국 불교가 시작된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승되고 있는 종교적 특색이다. 비록 조선시대에는 탄압과 통제를 받아 위축되었지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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