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茅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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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마을의 입구나 들판에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

개설

모정(茅亭)은 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이은 정자(亭子)로 마을의 집회소 구실을 하던 건물이다. 모정에서는 동중총회(洞中總會)나 두레·품앗이의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모정은 마을 사람들의 집합소이자 휴식처로 이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모정은 농촌 마을의 입구나 들판에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로 방이 없이 마루로만 구성된 소박한 규모의 초가지붕 건물이다. 시정(詩亭)·우산각(雨傘閣)·농정(農亭)·농청(農廳)·양정(凉亭)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며 주로 호남 지방에 집중 분포한다. 호남 중에서도 현재의 전라남도 지방에 모정 분포도가 높으며,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모정이 극히 희박하다. 모정은 대부분 정호(亭號)가 없어 사족들의 이름 있는 누정과 구분되며, 위치도 마을 입구에 있거나 마을과 들판 사이에 농군들의 휴식소로 간편하게 지은 집이라는 점에서 경관이 좋고 한적한 곳에 있는 사족들의 정자와 구분된다.

변천 및 현황

모정은 마을의 집회 장소로, 마을 사람들의 모임인 동회(洞會)의 장소이기도 하였고 두레의 집합 장소, 두레 작업 계획을 짜는 곳, 두레 노동 후 휴식 장소 등으로도 이용되었다. 따라서 모정은 자치 공동체로써 마을민의 여론과 의견을 규합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형태

모정은 전통 농촌 공동체 문화의 상징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마을민의 휴식처이자 공동 공간이었고, 농군들의 휴식처로 청장년 일꾼이 주로 이용하던 정자이다. 모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노래와 잡담을 하고, 때로는 음담패설도 주고받는 등 대중적·서민적 분위기가 서린 공간이다. 건축사나 사회사 측면에서는 영남의 누정 문화와 호남의 모정 문화를 커다란 지역적 차이이자 특징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모정 관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 내용도 농민들의 휴식처이자 모임의 장소로써가 아닌 궁궐의 건물, 혹은 종실이나 사대부가의 집 안에 있는 정자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태종이 1403년(태종 3) 익안대군(益安大君)이방의(李芳毅)의 집을 방문하여 문병하는데 모정(茅亭)에 올라 잔치를 베푼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3년 8월 1일). 1421년(세종 3)에는 상왕, 즉 태종이 함께 모정(茅亭)에 나아가서 정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3년 6월 5일) (『세종실록』 3년 6월 17일). 그리고 세조가 새 모정(茅亭)을 세울 터를 물색하게 하고, 중궁과 함께 후원의 새 모정에 나간 기사도 있다(『세조실록』 7년 1월 21일) (『세조실록』 13년 4월 19일).

참고문헌

  • 박광순, 「모정의 사회경제적 기능의 추전(推轉) 과정: 그 발전 형태를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4, 1966.
  • 박준규, 「한국의 누정고」, 『호남문화연구』17, 1987.
  • 안성훈, 「모정의 기능과 변화 양상」, 『민속학연구』1, 1999.
  • 전봉희, 「전남의 모정 건축」, 『건축역사연구』3,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