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병(毛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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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광해군 13)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자 명의 장수 모문룡이 가도(椵島)에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고 후금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지휘한 군대.

개설

후금에게 요동을 상실한 명은 중원 방어를 위해 모문룡을 요동반도에 파견하였다. 모문룡은 요동의 난민들을 규합해 1621년(광해군 13) 여름에 요동반도 연해의 일부 섬들을 점령하고 한때 압록강 이북의 진강(鎭江)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평안도 지역에 주둔하며 후금의 배후를 견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1622년 겨울에는 근거지를 평안도 철산 근해의 가도로 옮겨 동강진을 설치하고 요동 수복을 구호로 내걸었다.

가도에 들어간 모문룡은 명나라에서 건너온 주민들을 편성해 군대 조직을 강화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모병의 주축이었다. 후금을 견제하고 요동을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명과 조선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끌어냈으나, 정작 정묘호란 때에는 후금 군과 싸우지 않은 채 섬에 웅거하였다. 이후에도 명과 조선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면서도 후금과는 싸우지 않고 오히려 독자 세력을 구축하다가, 1629년(인조 7)에 명의 장수 원숭환(袁崇煥)의 계략에 의하여 살해되고, 모병은 해산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19년 사르후[薩爾滸] 전투 패배로 요동의 지배권을 후금에게 내어 준 명은 후금이 조선과 손을 잡고 명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명은 남진하는 후금을 해상에서 견제하고자 하였다. 1621년 모문룡은 순무(巡撫)왕화정(王化貞)의 명령에 따라 200여 명의 수군을 이끌고, 요동반도 연해의 저도(猪島)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요충지 진강(鎭江)을 기습해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후금의 반격으로 물러났다. 진강 습격은 실패로 끝났으나 승승장구하던 후금에 큰 충격을 주었다. 후금의 배후를 위협할 세력으로 떠오른 모병은 명 조정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모문룡은 조선의 서북방 철산·용천 등지를 전전하며 형세를 관망하면서, 이미 점령한 요동 연해의 섬에 군사를 배치해 요동 회복의 거점으로 삼았다. 조선의 평안도 일대에 주둔하고자 한 모병은 요동 주민의 유입으로 인하여 후금의 조선 침입을 우려한 광해군의 요구에 밀려 철산 앞바다의 가도로 옮겨 들어갔다. 모문룡은 가도에 동강진을 설치하고 요동수복의 기치를 내걸었다. 명의 일부 신료들은 군량 수송의 어려움을 들어 모병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명의 희종은 모병을 지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모병의 존재에 대하여 조선 조정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광해군이 모병의 조선 내 주둔을 후금의 조선 침공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보아 극력 반대한 데 반하여, 비변사의 신료들은 오히려 후금의 침입을 막아 주는 방파제로 인식하였다.

조직 및 역할

가도의 모병은 대부분 요동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모문룡은 이들로 군대를 편성해 싸우면서 농사짓는 차전차경(且戰且耕) 정책을 썼다. 모문룡이 이 민병대를 동원해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였으므로, 후금은 명과 조선의 관계를 끊을 목적으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입해 가도를 공격해 모병을 신미도(身彌島)로 몰아냈다.

모문룡은 청군이 철수한 후 가도로 돌아왔는데, 군량이 떨어지면 육지로 올라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조선도 모병과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며, 명나라조차 모병을 신임하지 않았다. 마침내 1629년(인조 7)에 모문룡이 명의 원숭환에게 살해됨으로써 모병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637년 소멸되었다.

변천

명은 청군의 요동 침입을 막기 위하여 모병을 지원하고자 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명의 요구를 최소한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인조는 명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그를 이용하려고 하였으므로, 조선은 모병의 과도한 군량과 군마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모병들의 요구는 인조 정권의 큰 부담이 되었다. 평안도의 극심한 기근과 모병의 군량 보급 문제로 조선의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모병에게 조선 백성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명은 1629년(인조 7)에 요동 경략(經略)원숭환에게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원숭환은 여순(旅順) 근처의 쌍도(雙島)로 모문룡을 유인해 살해하였다. 모문룡 사후에도 모병의 일부가 가도에서 군진을 유지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에게 항복한 직후에 청과 조선의 연합군이 가도를 완전히 점령해 남은 병력을 일소했다.

참고문헌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계승범, 「광해군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 2007.
  • 정병철, 「명말 요동 연해 일대의 ‘해상세력’」, 『명청사학회』 32, 2005.
  • 한명기, 「이여송과 모문룡」, 『역사비평』 90,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