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통사(明通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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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맹인들을 구호하기 위해 설치한 한양의 절.

개설

명통사(明通寺)는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을 구제하는 활인원(活人院)과 같이 맹인들을 구호하는 차원에서 설치된 절이다. 맹인들은 절에서 거주하며 불교나 도교 경전을 독송(讀誦)하여 가뭄에 비를 빌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도 했다. 명통사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한 최초의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세조대까지도 곤궁하고 어디에도 의탁할 수 없는 백성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에 대한 명을 내릴 때 명통사의 맹인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특징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 명통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장님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장님들은 초하루와 보름날에 한 번씩 모여 불경(佛經)을 외며 축수(祝壽)하는 것을 일삼았다."라고 하였다. 성현은 처음에는 ‘명통시[明通寺]’라고 하여 관청의 호칭을 썼지만, 맹인에게 관청을 설치할 리가 없다고 추측하였다. 다만 ‘맹청(盲廳)’이 명통사의 전신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맹인이 명통사에서 거주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맹인은 황해도의 봉산(鳳山)·황주(黃州) 등지에 특히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조선시대 기본 신분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범주에도 끼지 못하여 의식(衣食)을 해결할 방법이 없으므로 『주역』 등의 역서를 보며 점을 배우고, 아울러 잡귀를 몰아내고 병을 다스리는 불교와 도교의 경문을 외워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또한 스승과 제자나 위아래의 질서가 매우 엄중하였다. 이들은 왕이 왕릉과 왕비릉인 능침을 알현하기 위해 거둥할 때에는 도포를 입고 떼를 지어 성 밖으로 나가 왕의 행렬을 공경스럽게 전송하고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부터 국가에서는 가뭄이 들면 맹인들로 하여금 명통사에 모여 비를 빌게 하였다. 태종은 가뭄이 심하자 문무 신료들에게 명하여 무녀(巫女)와 맹인, 승려들을 불러 비를 빌도록 하였다(『태종실록』 2년 7월 2일). 이때 무녀는 국가 재정을 담당하던 관아인 사평부에, 맹인은 명통사에, 승려는 경기도 개성의 연복사에 모이도록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왕이 그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쌀 30석을 내려주었고(『태종실록』 13년 7월 5일), 토목과 건축에 관한 일을 관장한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명통사를 다시 짓게 하였으며 노비까지 주었다(『태종실록』 17년 6월 16일). 이밖에 단종은 집현전 교리(校理)로 수양대군의 집권을 반대했던 이현로(李賢老)의 집을 명통사에 내려주기도 하였다(『단종실록』 1년 12월 2일).

1457년(세조 3년)에는 왕이 조목별로 열거하며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을 구제하는 명을 내렸는데, "불구자나 중병을 앓고 있는 자로서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와 맹인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를 설립하였으니, 농아와 절름발이 등의 무리는 한성부에서 책임지고 동서활인원에서 후하게 구휼하라."(『세조실록』 3년 9월 16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기사 이후로 명통사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볼 때 성종대 이후 도성 내의 사찰 금지령이 더욱 강화되면서 명통사도 철폐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慵齋叢話)』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박상환, 『조선시대 기로정책(耆老政策) 연구』, 혜안, 2000.
  • 이능화·이종은 역주, 『조선도교사』, 보성문화사, 1986.
  • 이정 편저,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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